대진국 (발해)_후 고구려

대진국(발해)_후 고구려


대중상의 후고구려 건국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개화(開化) 27년(단기 3001, 668)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振國)장군 대중상(大仲象)이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8,000명이었다.
함께 동쪽으로 돌아가 동모산(東麰山)에 이르러 웅거하고,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 보전하여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셨다.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성에서 합류하는 자가 많았다.
오로지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다가 중광 32년(신시개천 4596, 단기 3032, 699) 5월에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요 시호(諡號)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이시다.

대조영의 옛 고구려 영토 회복과 대진 건설

태자 조영이 부고를 전한 사자를 따라 영주(營州), 계성(薊城)에서 무리를 이끌고와 제위에 오르셨다(신시개천 4596, 단기 3032, 699),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기시고 10만 명의 군병을 모아 그 위용과 명성을 크게 떨치셨다.
이에 정책을 정하고 제도를 세워 당(唐)을 적으로 삼고 항거하여 복수할 것을 맹세하셨다.

말갈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 거란 장수 이진영(李盡榮)과 손을 잡고 군대를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를 천문령(天門嶺)에서 대파하셨다.
여러 장수를 나누어서 군현을 두어 지키게 하시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불러 어루만지고 보호하여 정착하게 하시니 백성의 신망을 크게 얻어 나라의 모든 기강이 새로워졌다.
이에 국호를 정하여 대진(大震)이라 하시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셨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시고 6천 리 땅을 개척하셨다.

천통 21년(신시개천 4616, 단기 3052, 719) 봄에, 대안전(大安殿)에서 붕어하시니, 묘호는 태조(太祖)요 시호는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이시다.

태자 무예(武藝)가 즉위(신시개천 4616, 단기 3052, 719)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치셨다.
서쪽으로 거란과 더불어 국경을 오주목(烏珠牧)으로 정하시니 그곳에서 동쪽 10리에 황수(滉水)가 흐른다.
이 해(단기 3065, 732)에 개마(蓋馬) 구다(句茶) 흑수(黑水)등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라 칭하고 조공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당나라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고, 등래(登登)(산동성의 등주(登州)와 내주(箂州)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으셨다.
이에 당나라 임금 이융기(李隆基)가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싸움에 이기지 못하였다.

대진과 남북국 시대

다음 해(단기 3066, 733)에 수비 장수 연충린(淵忠麟)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遼西) 대산(帶山) 남쪽에서 당나라 군사를 대파하였다. 이에 당은 신라와 밀약을 맺고 동남방의 여러 군을 급습하여 천정군(泉井郡)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조서를 내리시고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어 이를 격파할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신라와 당나라 군사 중에 얼어죽는 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河西)의 이하(泥河)에 이르러 경계를 정했는데, 지금의 강릉 북쪽 이천(泥川)이 그곳이다.
해주 암연현(岩淵縣)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를 접하였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때부터 신라가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임진강 이북 여러 성이 모두 우리 대진에 속하게 되었다.
또 다음 해(단기 3067, 734)에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쳐들어왔으나 마침내 아무 공도 없이 물러갔다.

신교 문명으로 강성해진 대진

인안 16년(단기 3067, 734)에 구다.개마·흑수 등 여러 나라가 나라를 바쳐 항복하므로 취하여 성읍으로 삼으셨다.
이듬해(단기 3068, 735)에, 송막(松漠)에 12성을 쌓고 또 요서(遼西)에 6성을 쌓으시어 드디어 5경(京) 60주(州) 1군(郡) 38현(縣)을 두셨다. 강역이 9천여 리나 되었으니 가히 강성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 해에 당과 왜, 신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가 모두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심지어 ‘발해 사람 셋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때 임금과 백성이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고 의로움을 즐겼다. 오곡이 풍등하고 온 세상이 평안하여 대진육덕의 노래[大震六德之歌]를 지어 당시의 모습을 찬미하였다.

이듬해(단기 3069, 736) 3월, 안민현(安民縣)에 감로(甘露)가 내렸다. 예관(禮官)이 경축하는 예식을 거행할 것을 청원하므로 그 말을 따르셨다. 이달 16일에, 서압록하 상류에서 삼신일체(三神一體)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셨다. 서압록(지금의 서요하)은 옛 고리국의 땅이다.

4세 문황제의 신교 문화 대부흥

인안 19년(신시개천 4634, 단기 3070, 737)에 임금께서 붕어하셨다. 묘호는 광종(光宗)이고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시다.
태자 흠무(欽武)가 즉위(신시개천 4634, 단기 3067, 737)하였다.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고치고, 도읍을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셨다.
이듬해(738)에 태학(太學)을 세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환단의 옛 역사(桓檀古史)를 강론하시고, 또 학자들에게 국사(國史) 125권을 편찬하도록 명하셨다.
문치(文治)는 예악을 일으키고, 무위(武威)는 여러 주변 족속을 복종시켰다. 이에 동방 대광명의 현묘한 도(道)가 백성들에게 흠뻑 젖어들고, 홍익인간의 교화가 만방에 미쳤다.

대흥 45년(단기 3114, 781)에, 치청(淄靑)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셨다. 이정기는 고구려인으로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대흥 22년(단기 3091, 758)에 병사들이 군의 통수자 이희일(李希逸)을 쫓아내고 정기를 세웠다. 이정기가 죽자(단기 3114, 781) 아들 납(納)이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렸다(단기 3114, 781).

대흥 56년(단기 3125, 792)에 납이 죽자 아들 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단기 3125, 792). 사고가 죽자(단기 3139, 806) 그 집 사람들이 발상(發喪)을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 밀(密) 땅에서 (이복동생) 사도(師道)를 맞아들여 받들었다(단기 3139, 806).

대진 역대 성황의 세계

대흥 57년(단기 3126, 793)에 임금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는 세종(世宗)이요 시호는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이시다. 나라 사람들이 그 친족 아우 원의(元義)를 옹립하였으나, 원의는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단기 3127, 794)년에 나라 사람들이 원의를 폐하고 선제(先帝)의 손자 화흥(華興)을 맞이하여 옹립하였다. 연호를 고쳐 중훙(中興)이라 하였다. 이듬해(단기 3128, 795)에 붕어하시니 묘호는 인종(仁宗)이요 시호는 성황제(成皇帝)이시다.
임금의 숙부인 숭린(崇璘)이 즉위하니, 이분이 목종 강황제(穆宗康皇帝)(7세)이시다.

의종 정황제(毅宗定皇帝) 원유(元瑜)(8세), 강종 희황제(康宗僖皇帝) 언의(言義)(9세) 철종 간황제(哲宗簡皇帝) 명충(明忠)(10세)을 지나 성종 선황제(聖宗宣皇帝) 인수(仁秀)(11세)에 이르렀다.
이분은 타고난 천품이 영명하시고, 덕성과 기질이 신령스럽고, 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시어 태조의 풍모가 있었다.

대진의 통치 영역과 신교의 생활화

선황제께서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泥勿),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淵) 등 일곱 주(州)를 설치하고, 북쪽으로 염해(鹽海), 나산(羅珊), 갈사(曷思), 조나, 석혁(錫赫)과 남·북 우루(虞婁)를 공략하여 여러 부(部)를 설치하셨다.
장백(백두산) 동쪽을 안변(安邊)이라 하고, 압록강 남쪽을 안원(安遠)이라 하였다.
목단 동쪽을 철리(鐵利)라 하고, 흑수(흑룡강) 위를 회원(懷遠)이라 하고, 난하 동쪽을 장령(長嶺), 장령 동쪽을 동평(東平)이라 하였다. 우루(虞婁)는 북대개마 남북에 자리잡고 있었다.

땅 넓이는 9천리로 영토가 크게 개척되고 문치(文治)를 잘 베풀어서, 위로 수도에서 아래로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가 있고 구서오계(九誓五戒)를 아침저녁으로 외워 익혔다.
봄가을로 관리의 공적을 조사하고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어진 인재를 천거하였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힘을 차차 쌓아 기르면서 집에서 인재로 쓰이기를 기다렸다.

이로부터 나라가 부강해지고 안팎이 편안하고 기쁨이 넘쳐 도둑질하거나 간사하게 모의하는 폐단이 저절로 사라졌다. 당과 왜, 신라, 거란이 모두 두려워하여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 만방에서 모두 성인이 다스리는 해동성국이라 칭송하였다. 5대(당나라가 망한 후 일어났지만 단명으로 끝난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등 다섯 나라)의 흥망시기(단기 3240, 907~단기 3293, 960)에 야율(耶律)이 비록 여러 번 싸움을 걸어 왔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뒤에 장종화황제(莊宗和皇帝) 이진(彛震)(12세), 순종 안황제건황(順宗安皇帝) 건황(虔晃)(13세), 명종 경황제(明宗景皇帝) 현석(玄錫)(14세)을 지나 애제(哀帝) 인선(諲譔)(15세)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당하였다(신시개천 4823, 단기 3259, 926). 세조(世祖)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역대 황제의 연호와 주요 지명

목종(穆宗)은 연호를 고쳐 정력(正曆)이라 하고, 의종(毅宗)은 연호를 영덕(永德), 강종(康宗)은 주작(朱雀), 철종(哲宗)은 태시(太始), 성종(聖宗)은 건흥(建興), 장종(莊宗)은 함화(咸和), 순종(順宗)은 대정(大定) 명종(明宗)은 천복(天福) 애제(哀帝)는 청태(淸泰)라 하였다.

대진국의 남경남해부는 본래 옛 남옥저 땅인데, 지금의 해성현이다.
서경압록부는 본래 옛 고리국(槀離國) 땅이고, 지금의 임황(臨潢)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이다. 그러므로 옛 기록에서 말한 안민현은 동쪽에 있고 그 서쪽은 임황현인데,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임황부가 되었다. 바로 옛날의 서안평이다.

의려국 임금이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됨

정주(正州)는 의려국(依慮國) 도읍한 땅이다.
의려국 왕이 선비(鮮卑) 모용외(慕容廆)에게 패한 뒤 핍박당할 것을 근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이때 문득, “나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리오?” 라는 생각이 들어, 은밀히 아들 부라(扶羅)에게 왕위를 넘기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를 건너니,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스스로 삼신(三神)의 부명(符命)에 응한 것이라 하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하례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족에게 패하자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이 북옥저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가 즉위하였다.
이 뒤 모용외가 또다시 침략하여 아국사람들을 약탈하였다.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

일본에는 옛적에 이국(伊國)이 있었는데 이세(伊勢)라고도 불렀고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伊都國)은 축자(筑紫)에 있었는데 바로 일향국(日向國)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倭)(응신조 왜를 말함)에 속하고, 그 남동쪽은 안라(安羅)에 속하였다. 안라는 본래 홀본(忽本)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末盧國)의 남쪽을 대우국(大隅國)이라 했는데 거기에 시라군(始羅郡)이 있었다.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다.

한·중·일 삼국의 교역과 교류

남만(南蠻)· 침미(忱彌)· 환하(晥夏)· 비자발(比自㶱) 족속들이 모두 조공을 바쳤다.
남만은 구려(九黎)의 후예로 산월(山越)에서 온 자들이고, 비자발은 변진(弁辰) 비사벌(比斯伐)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읍락이고, 환하(晥夏)는 고구려에 예속된 자들이다.

이때 왜인은 산과 섬에 흩어져 살았는데 나라가 100여 개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狗邪韓國)이 가장 컸는데, 본래 구야(狗邪)의 본국 사람이 다스리던 곳이다.
바다이에서 장사하는 배는 모두 종도(種島)(다네시마)에 모여 교역하였는데,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이 모두 통상하였다.

처음에 바다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이르는데, 사방이 4백여 리쯤 된다.
또 바다 건너 천여 리를 가면 일기국(一歧國)에 닿는데, 사방이 3백 리쯤 되고 본래 사이기국(斯爾歧國)이다. 자다(子多)의 여러 섬이 모두 조공을 바쳤다.
또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더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이르는데, 본래 읍루인(挹婁人)이 모여 살던 곳이다. 동남쪽으로 육지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이르는데, 곧 반여언(盤余彦) 옛 고을이다.

대진의 정통 맥과 망국 이후 회복 운동

신당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 고구려에 붙어 있던 나라인데, 건국자의 성은 대씨(大氏)이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인물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을 확보하고 오루하(奧婁河)를 의지하였다.
중상이 죽자 아들 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다가 곧 비우의 무리를 합하고 땅이 거칠고 멀리 떨어진 것을 믿고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하였다.
부여·옥저·변한·해북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사씨(史氏)는 말한다. 걸걸중상이 패망한 후 남은 무리를 모아 험한 곳으로 피신하여 스스로 보전한 것은 옛날에 태왕(太王)이 빈(邠)을 떠난 것과 같다.
고왕(高王) 조영(祚榮)이 창업의 자질이 있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닦으신
것은, 구천(句賤)이 월(越)나라를 일으킨 것과 같다.
영토가 확보되자 문덕으로써 이를 닦고 제도를 고치고 관작을 정비하시고, 군현을 두어 큰 나라에 대항하셨다.
나라의 영역이 5천리에 이르고 역사가 300년에 이르러 당시에 사방에 대진국을 능가할 나라가 없었으니 역시 강성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고려 현종(顯宗) 원문대왕(元文大王) 20년(단기 3362, 1029)에,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大延琳)은 태조 고황제(대조영)의 7세 손으로, 부마(駙馬)인 유수(留守) 소효원(蕭孝元)과 남양(南陽)공주를 가두고, 호부사(戶部使) 한소훈(禕紹勳) 등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국호를 흥료(興遼)라 하고,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다.
고길덕(高吉德)을 고려에 파견하여 나라 세운 일을 알리고 아울러 도움을 청하였다.

요동유수(遼東留守) 소보선(簫保先)이 정치를 가혹하게 하자, 고려 예종(睿宗) 문효대왕(文孝大王) 11년(단기 3449, 1116) 정월 초하루에, 동경(東京) 비장(裨將)인 발해 사람 고영창(高永昌)이 수십 명과 함께 술김에 용맹을 믿고 칼을 들고 담을 뛰어넘어 부위(府衛)에 들어갔다.
대청에 올라가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오니 대비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보선이 나오자 무리가 그를 죽였다.
가유수(假留守) 대공정(大公鼎)과 부유수(副留守) 고
청신(高淸臣)이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서쪽 문으로 나가 요나라로 달아났다.
영창이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라 하고, 연호를 융기(隆基)라 하고, 요동 50여 주를 차지했다.
송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馬韓)의 후예로서, 요(遼)에게 패하자 그 우두머리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정해 스스로 나라 이름을 정안국이라 하였다.

개보(開寶)(북송 태조의 연호) 3년(단기 3303, 970)에 그 왕 열만화(烈萬華)가 조공 바치러 온 여진을 통해 글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북송 2세 임금) 때 왕 오현명(烏玄明)이 다시 여진을 통해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곳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종은 답서에서 대략 “경이 마한 땅을 차지하고 큰 파도에 끼어 있다는 글을 올리니…” 운운했다. 단공(端拱)(태종의 연호, 단기 3321, 988~단기 3322, 989)과 순화(淳化)(태종의 연호, 단기 3323, 990~단기 3327, 994)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글을 올리더니, 그 뒤에는 올리지 아니하였다.

대진국의 멸망

대진국 (15세) 애제(哀帝) 청태 26년(단기 3259, 926) 봄 정월에, 야율배(耶律倍)가 아우 야율요골(耶律堯骨)과 함께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였다.
애제가 나가 항복하시니 나라가 망하였다.
2월 병오에, 요 태조가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맏아들 배(倍)를 인황왕(人皇王)으로 봉하여 왕노릇하게 하였다. 연호를 감로라 하였다.

홀한성을 고쳐 천복(天福)이라 하고, 천자의 관과 옷을 표준으로 삼아서 열두 줄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다.
대진국의 옛 제도를 이어받아 숙부 질랄(迭刺)을 좌대상(左大相)으로 삼고, 대진의 늙은 재상(이름은 알 수 없음)을 우대상(右大相)으로 삼고, 대진 사도(司徒) 대소현(大素賢)을 좌차상(左次相), 야율우지(耶律羽之)를 우차상(右次相)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형수를 제외한 나라 안의 모든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 단과 말 천 필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조하였다.
감로 27년(단기 3285, 952) 겨울 12월 경진에, 요나라가 동경 중대성(中臺省)을 폐지하자 동단국이 없어졌다.

    <환단고기 역사책 원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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