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고려국 개국) 하

고려국(고려국 개국) 하


이암의 역사의식과 고려 권신의 사대주의

일찍이 시중(侍中) 행촌 이암이 상소하여 권신(權臣) 무리가 국호(國號)를 폐하고 행성(行省)을 세우고자 하는 의논을 저지하였다. 그 상소문은 대략 이러하다.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삼고 제 풍속으로 민속을 삼으니, 나라의 경계를 깨뜨릴 수 없으며 민속 또한 뒤섞이게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桓檀, 환국-배달-고조선) 시대 이래로 모두 천상 상제님의 아들(천제자天帝子 천자天子)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원래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남의 굴레 밑에 있으나 뿌리가 같은 조상(一源之祖)에게 물려받은 정신과 육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배달의) 신시개천(神市開天)과 (고조선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이 천하 만세에 대국으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천수(天授) 태조(왕건)께서는 창업의 자질을 갖추시고, 고구려의 건국이념인 다물 정신을 계승하여 세상을 평정하시어 국가의 명성을 크게 떨치셨습니다.
간혹 이웃에 강적이 생겨 승세를 타고 횡포를 부려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분발하여 자주와 부강의 계책을 꾀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같은 간악한 무리가 감히 멋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나 어찌 고려라는 국호를 폐할 수 있으며, 임금의 힘이 비록 약하나 위호(位號)를 어찌 낮출 수 있겠사옵니까?
이제 이러한 거론은 모두 간사한 소인배가 죄를 감추고 도망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일 뿐, 결코 나라 사람들의 공언(公言)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마땅히 도당(都堂)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옵니다.

행촌 시중(侍中)이 지은 저서가 3종이 있다.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어 시원 국가의 체통을 밝혔고,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어 환.단(桓檀)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도학(道學)과 심법(心法)을 이어받아 밝혔다.
농상집요(農桑輯要)는 세상을 다스리는 실무(實務) 관련 학문을 담은 것이다.
문정공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서문을 붙였다.
“무릇 입을거리와 먹을거리를 넉넉하게 하고 재물을 풍족하게 하며, 씨뿌리고 모종하고 싹을 자라게 하는 방법을 분야별로 나누고 같은 것끼리 묶어 자세히 분석하고 촛불이 비추는 것처럼 명료하게 기록하였다. 진실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좋은 책이 되리라.”

행촌 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서 유람을 하다가 밤에 태소암(太素庵)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에 소전(素佺)이라 하는 한 거사가 기이한 옛 서적(奇古之書)을 많이 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었는데, 모두 환단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의 진결(恒檀傳授之眞訣)이었다.

세속의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고사(古史)에 박식한 행촌의 학문은 그 뛰어남이 칭찬 받을 만하였다.
그 참전(參佺)의 계율을 닦는 법도는 삼신으로부터 받은 성품(性)을 응결시켜 지혜(慧)를 이루고, 삼신으로부터 받은 생명(命)을 응결시켜 덕(德)을 이루며, 삼신으로부터 받은 정기(精)를 응결시켜 힘(力)을 이루는 것이다.
우주에 삼신(三神)이 영원히 존재하시고 인물에 삼진(三眞)이 불멸하는 것은, 마땅히 하늘 아래 영원한 대정신(우주정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생성과 변화가 무궁하기 때문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도가 하늘에 있으면 삼신이 되고, 도가 사람에게 있으면 삼진이 된다.
그 근본을 말하면 오직 하나일 뿐이다. 오직 하나인 것이 도요, 둘이 아닌 것이 법이다.
위대하도다 환웅천황이시여!
뭇 사람 중에 먼저 나와 천도의 근원을 체득하시고 대광명의 가르침(神敎)을 세우시니, 신시개천의 의미가 비로소 세상에 크게 밝아졌도다.
지금 우리는 글을 통해 도를 구하고, 전(佺)에 참여하여 계(戒)를 받아 우리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으나, 아직도 계발하지 못하고 있다.
또 온갖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나니, 늙어감이 한스럽다!”
선생은 시중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도(江都) 홍행촌에 들어가 스스로 호를 홍행촌수(紅杏村叟)라 하고, 마침내 행촌 삼서(杏村三書)를 저술하여 집에 간직해 두었다.

헌효왕(獻孝王)(28세 충혜왕의 시호) 복위 5년(단기 3677, 서기 1344) 3월에, 행촌 이암이 어명을 받아 참성단에서 천제를 드릴 때 백문보(白文寶)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덕으로 신을 수호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있고, 영재를 길러 국가를 지키는 일은 그 공이 서원을 세우는 데 있느니라. 신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 역시 신에게 의지하여야(神依於人, 人依於神) 백성과 국가가 길이 편안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 드리는 정성은 결국 근본에 보은(報恩)하는 정신으로 돌아감이니, (그 길을) 인간 세상에서 찾음에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인물 정지상

정지상(鄭之祥)은 하동 사람이다.
누이동생으로 인해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敬孝王)(공민왕의 시호)을 만나 대궐에 들어가 수종 들며 공로가 있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곧바로 뽑혀서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이르렀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경내에 들어가, 세도가가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즉시 잡아다가 매질하고 문초하여 모든 군에 알리니 온도
(道) 사람의 마음이 섬뜩하였다.

야사불화(埜思不花)란 자는 본국(고려국) 사람인데, 원나라에 들어가 순제(順帝)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가 되었고, 아우 응려(應呂)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세력을 믿고 위세가 당당하게 복을 누리던 터라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불화가 강향사(降香使)라는 직함을 받고 본국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방종과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존무사(存撫使)와 안렴사가 많은 치욕을 당하고 욕을 먹었지만 감히 거슬러서 어길 수 없었다.

전주에 이르자 지상이 기다렸다가 공손하게 맞이하였으나, 불화는 심히 거만하게 대하였다.
반접사(伴接使) 홍원철(洪元哲)이 지상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나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여 불화에게 “지상이 천자의 사신을 업신여긴다”라고 하자,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였다.
지상이 분노하여 크게 소리지르고 주(州)의 관리를 속여 이렇게 말했다.
“국가에서는 이미 기씨(奇氏)를 모두 주멸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다.
재상 김경직(金敬直)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런 정도의 사자를 제압하기는 쉽거늘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나를 구하지 않느냐? 장차 너희 주(州)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게 되리라.”

이에 읍리가 소리를 치며 달려 들어와 결박을 풀고 부축하여 나갔다.
지상이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불화·원철 등을 잡아 가두고, 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를 빼앗아 가지고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올 때, 공주를 지나다가 응려를 잡아 철추로 때리자 며칠 만에 죽었다. 지상이 와서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임금이 깜짝 놀라 순군부(巡軍府)에 내려 하옥시키시고 행성원외랑 정휘(鄭暉)에게 명하시여 전주목사 최영기(崔英起)와 읍리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또 차포온(車蒲溫)을 보내시어 어주를 하사하여 불화를 위로하게 하시고 금패를 돌려주셨다.

원나라에서는 단사관(斷事官) 매주(買住)를 보내어 지상을 국문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기씨를 모두 죽이고, 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을 삼으셨다. 이후 다시 옮겨 호부시랑, 어사중승이 되었고, 벼슬이 판사(判事)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엄격하여 모든 육사죄에는 반드시 지상을 파견하였다.
지상의 아내는 홀로 담양에 거주하다가 왜적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아들 종(從)은 박위(朴葳)를 따라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다.

고려 왕조 때 천제를 찬양한 노래

문대(文大)는 고종 안효대왕(安孝大王)(23세) 18년(단기 3564, 1231)에, 낭장(郎將)으로서 서창현(瑞昌縣)에 머물다가 몽골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몽골 군사가 철산성(鐵山城)아래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고을 사람들에게 ‘진짜 몽골군이 왔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그러나 문대가 소리 높여, “가짜 몽골군이니 항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에 몽골 사람이 문대를 참수하고자 하다가 다시 소리치게 하였다.
다시 전과 같이 하므로 드디어 죽였다.
몽골군이 성을 몹시 급하게 공격하니, 성중에 양식이 떨어져 더 지킬 수가 없었다.
곧 함락되려 하므로 판관(判官) 이희적(李希績)이 성 안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모아 창고 속에 들어가게 한 후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이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경효왕(공민왕) 12년(癸卯, 단기 3696, 1363) 3월에, 밀직사(密直使) 이강(李岡)이 어명을 받들고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렸다. 이어서 시를 지어 나무판에 새겼는데, 시는 이러하다.

봄바람 속에 만물 정취 짙어 가는데
왕명 받들고 떠나온 길 멀기도 하여라.
이른 새벽 말을 달려 구중궁궐 떠났는데
노 젓는 저녁 무렵, 흰 갈매기는 파도 위를 날아 오르네.
하늘 복판에 솟은 산은 푸른 빛깔 뽐내고
골짜기엔 봄기운 완연해 풀이 절로 꽃을 피우네.
묻노니, 신선 사는 봉래산 그 어드메뇨.
사람들은 이곳이 바로 선가(仙家)라 하네.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로워 체골조차 신선이 되려 하네.
멀리 인간사 생각해 보니 참으로 아득하구나.
자리 깔고 약소한 제물이나마 올리는 것은 홍건적 물리친 뒤이지만
돌로 쌓은 영기 서린 제단은 태곳적 것이라네.
눈앞에 천리 강산 훤히 보이고 이내 몸, 구중 하늘에 오른 것 같아라.
이번 길에 서로 의탁할 짝은 없지만
적을 물리치고 환도한 첫 해를 기억이나 하자꾸나.

강릉왕(江陵王) 우(禑) 5년(단기 3712, 1379) 3월 신미에, 사자를 보내어 참성단에서 천제 드릴 것을 명하셨다.
대제학(大提學) 권근(權近)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초헌(初獻): 바다 가운데에 산이 높으니 인간 세상의 번뇌와 시끄러움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제단 중앙은 하늘에 닿을 듯하니 신선의 수레를 타고 강림하시는 삼신님을 맞이하옵니다.
조촐한 음식을 올리오니 밝으신 삼신께서 계시는 듯하옵니다.

이헌(二獻): 삼신께서 미혹됨이 없이 들어 주시나니 이 사람을 감싸 안고 베풀어 주십니다.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덮으시고 인간 세상을 굽어보십니다.
예를 극진히 하여 섬기나니 삼신께서 감응하시어 성신이 통하기를 축원하옵나이다.
곰곰이 헤아려 보건대 마리산은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지내시던 곳이옵니다.

성조(聖祖) 이래로 백성을 위해 법도를 세우고, 옛 법통을 계승하여 아름다움을 드리우셨습니다. 고종에 이르러 오랑캐(몽골)를 피해 도읍을 옮기고 또한 이곳에 의지하여 국본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국통이 끊어지지 않았고, 소자(우왕)가 이를 계승하여 더욱 공경하옵나이다.

하늘이시여! 어찌 외구(外寇)가 개같이 좀도둑질하여 우리 백성을 어란(魚爛)의 지경에 이르게 하시옵니까? 비록 변방이 침략을 받았으나 오히려 표문(表文) 올리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어찌 그 고을이 침략당하는 것을 보기만 하시옵니까?
어찌 밝은 위엄의 징험이 없으시겠습니까만 실로 저의 부덕한 소치이니 진실로 남에게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오직 자책할 뿐이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그 하는 일을 편안히 여기지 않는다면, 삼신께서도 장차 돌아가실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옛 법을 좇아 감히 지금의 환란을 고하오니, 조촐한 저의 정성이지만 기꺼이 받으시고 밝게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바다에는 큰 파도가 일지 않게 하시어 배를 타고 멀리서도 몰려들게 하소서.
하늘이시여! 천명을 내려 주시어 사직(社稷)이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고려 말, 왕조의 분열과 옛 영토 회복

천수 기원 439년은 경효왕(공민왕) 5년(단기 3689, 1356)이다.
이 해 여름 4월 정유(丁酉)에 대사도 기철(奇轍), 태감 권겸(權謙), 경양부원군 노책(盧頙) 등이 반역을 꾀하다가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으로 임명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철폐하였다.
이때에 원나라 왕실이 극도로 쇠약해져 오(吳)왕 장사성(張士誠)이 강소(江蘇)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소란스러운 일이 많았다.

최영 등이 고우(高郵)에서 돌아오자, 임금이 비로소 최영 등의 견해를 좇아 드디어 서북 땅을 회복할 계책을 정하셨다.
먼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계속해서 인당(印璫) 최영 등 여러 장수를 보내시어 압록강 서쪽 8참(八站)을 깨뜨렸다. 또 류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등을 보내시어 쌍성(雙城)등 옛 땅을 되찾게 하셨다.
10년(단기 3694, 1361) 겨울 10월에, 홍두적(紅頭賊) 반성(潘誠), 사류(沙劉), 주원장(朱元璋) 등 무리 십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범하였다.
11월에 도적이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음(李蔭), 조천주(趙天柱)가 전투에서 죽었다.
12월에, 임금이 복주(福州 경북 안동)에 이르러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으셨다.

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였다.
임금이 파천(播遷)한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겼다.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여기므로 임금이 또한 믿고 의지하셨다.
세운은, 애통하게 여기는 조서(詔書)를 속히 내려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신을 모든 도에 보내어 징병(徵兵)을 독려하시도록 임금에게 여러 번 청원하였다.

임금께서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이 세운에게 전하여 말하였다.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정승에게 기울이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장수에게 기울이는 법이다.
나는 문신(文臣)이라 나약하여 능히 군사를 부리지 못하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세운이 도당(都堂)에 나아가 분연히 소리 높여 류숙(柳淑)에게 군사를 징집하면서 기한이 늦은 일을 책망하였다.
전선으로 출발하려 할 때 이암이 세운에게 말했다.
“강력한 외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황성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삼한의 치욕이로다.
공이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어 무기를 들고 군사를 거느리니, 사직이 다시 편안해지고 왕업이 중흥함이 이번 한 판싸움에 달려 있도다.
우리 임금과 신하는 밤낮으로 공이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로다.”
권면하고 깨우쳐 전송한 뒤에 매일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독려하고 묘략을 내어 전해 주었다. 안우(安祐), 이순(李珣)(희필로 개명함. 이암의 종질), 한방신(韓方信) 등 여러 장수가 모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20년 신해(단기 3704, 1371) 2월 갑술에 여진 천호(千戶) 이두란 첩목아(李豆蘭帖木兒)가 백호(百戶) 보개(甫介)를 보내어 백호를 거느리고 투항해 왔다.
윤3월 기미에, 북요양원(北元)의 요양성 평장사 유익(劉益), 왕우승(王右丞) 등이 요양은 본래 고구려 땅이라 하여 우리나라에 귀순하고자 사람을 보내어 귀화를 청했다.
이때 조정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고, 국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임금이 정몽주를 명나라에 보내시어 촉(蜀)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게 하셨다.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살해하자 조야가 시끄러워 이 일에 대해 말하려는 자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바로 회신을 하지 않자, 유익 등이 마침내 금주(金州)·복주(復州)·개평(蓋平)·해성(海城).요양(遼陽) 등의 땅을 가지고 명나라에 가서 붙었다.
오호라! 당시 청론(淸論)을 떠들던 무기력한 자들이 한갓 편안함을 좇기만 일삼아 좋은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마침내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뜻 있는 사람의 한(恨)이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구나.

강릉왕(우왕)이 선제(先帝, 공민왕)의 명으로 즉위(단기 3707, 1374)하셨다.
이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써 붙이고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開元, 지금의 요령성 개원현)에 속하던 땅이니 거기서 관할하던 군인(軍人), 한인(漢人), 여진(女眞), 달달(達達), 고려(高麗)는 여전히 요동(遼東)에 속한다.”
운운 하였다. 조정의 중론이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다가 마침내 싸울 것을 결정하고, 나라 안의 병마를 크게 일으키고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使)로 임명하셨다.

태백일사 발문

갑자(연산군 10. 단기 3839, 1506)년에 내가 괴산(槐山)으로 귀양을 갔는데 마땅히 근신해야 할 처지였기에 아주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다.
이에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고 점고해 보니, 역사와 전기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과 평소에 노인들에게 들은 것을 함께 채록한 것이 있는데 책으로 완성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후 16년이 지난 경진(중종 15, 단기 3853, 1520)년에 내가 찬수관(撰修官) 신분이라 내각(內閣)의 비서(秘書)를 많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이전 원고를 순서대로 편집하여 태백일사(太白逸史)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감히 세상에 묻지 못하고 비밀히 간직하여 문밖에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일십당주인(一十堂主人)이 쓰노라.

         <환단고기종 桓檀古記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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