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구려 개국) 상
고구려 (고구려 개국) 상
고구려 국통의 뿌리 – 북부여 해모수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는데, 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고구려 : 지명地名)이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해모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검마산)에서 사셨다. 부여의 옛 도읍(백악산 아사달)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워 왕이 되셨다. 이분이 부여의 시조이시다.
머리에 오우관(鳥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을 차고, 오룡거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자가 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고 저물면 하늘에 오르셨다.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나라 안이 저절로 잘 다스려지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들에는 벼와 곡식이 가득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없고 백성도 태평세월을 누렸다. 해모수단군께서 처음 내려온 때는 임술(신시기천 3659, 단기 2095, 고열가단군 57, BCE 239)년 4월 8일로 진나라 왕 영정 8년이다.
북부여의 국통을 계승한 고주몽(고추모)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沃沮候)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으로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단기 2255, BCE 79)년 5월 5일이요, 한나라 왕 불릉(弗陵)원봉(元鳳) 2년이었다. 불리지가 세상을 뜨자, 유화 부인이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가니 지금의 서란(舒蘭)이다.
주몽이 장성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가섭원을 택해 살면서 관가에서 말기르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관가의 미움을 사게 되어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마침 부여 왕(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주몽이 마침내 왕의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시니(단기 2276, BCE 58),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고주몽 성제의 통치 영역과 대도 말씀[道言]
(고주몽 성제) 평락(平樂) 21년 갑오(단기 2307, BCE 27)년 10월,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이듬해 을미년에 졸본에서 눌견(訥見)으로 도읍을 옮기셨다. 눌견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이다.
(2세) 유리명제(琉璃明帝) 21년(단기 2335, CE 2), 도읍을 다시 눌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이곳을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 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거기에 머무르셨다.
(3세) 대무신열제(大武烈帝) 20년(단기 2370, 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이리하여 동압록(지금의 압록강) 이남이 우리(고구려)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海城)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
(10세) 산상제(山上帝) 원년(단기 2530, 197), 아우 계수를 보내어 공손탁을 쳐부수고,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함으로써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대변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성제께서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리셨다.
하늘의 신(삼신)이 만인을 한 모습으로 창조하고 삼진(三眞)을 고르게 부여하셨느니라. 이에 사람은 하늘을 대행하여 능히 이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태어나신 천제(상제님)의 아들 아니더냐!
슬기로운 이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며 계율을 잘 지켜 삿된 기운을 영원히 끝나니,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저절로 세상사람과 더불어 매사에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군사를 쓰는 것은 침략을 막기 위함이며, 형벌의 집행은 죄악을 뿌리뽑기 위함이니라.
그런고로 마음을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겨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지혜가 충만하고,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따라서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을 건지느니라.
이것이 곧 신시 배달 시대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마음을 연 교화의 방도이니, 천신을 위해 본성을 환히 밝히고, 뭇 창생을 위해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 공덕을 완수하고, 천하만세를 위해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아[智生雙修] 교화를 이루느니라.
을파소가 전한 참전계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郎)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이라 하는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神市) 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상제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寒盟)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두 스스로 심법을 바로 세우고 힘써 노력하여 훗날 세울 공덕에 대비하라.”
을지문덕의 호쾌한 심법 세계
을지문덕이 이렇게 말하였다.
“도로써 천신(삼신상제님)을 섬기고,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감싸 보호하라. 나는 천하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을 때, 성품과 목숨과 정기[精]로 나누어 받나니, 우리 몸 속에 본래 있는 조화의 대광명은 환히 빛나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감응(感應)하고, 이 조화의 대광명이 발현되면 도(道)를 통한다.
도를 통하는 것은, 삼물(三物)인 덕과 지혜와 조화력을 몸으로 직접 체득하여 실천하고, 삼가(三家)인 마음과 기운과 몸의 조화를 성취하며, 삼도(三途)인 느낌과 호흡과 감촉이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는 요체는 날마다 염표문(念標文)을 생각하여 실천하기에 힘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삼도(三途) 십팔경(十八境)을 고요히 잘 닦아(靜修境途) 천지광명(환단)의 뜻과 대이상을 지상에 성취하는 홍익인간이 되는 데 있느니라.”
환국시대에 오훈(五訓)이 있었고, 신시 시대에 오사(五事), 고조선 시대에 오행육정(五行六政)이 부여에 구서(九誓)가 있었다. 또한 삼한의 공통된 풍속에 오계(五戒)가 있었으니, 곧 효도. 충성. 신의. 용맹. 어짊이다. 모두 백성을 공명정대하고 평등하게 가르치고 무리를 조직하려는 뜻이 있었다.
역대 성군, 영걸의 역력한 자취
책성(연해주를 말함)에 태조무열제(6세)의 공덕을 새긴 기공비(紀功碑)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 안주(安州) 청천강 연안에 을지문덕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송덕비가 있다.
평양(平壤)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11세)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朝天石)이 있고, 삭주 거문산(巨門山)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九峰山)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천제(東川帝)를 또한 단군이라고도 하였다. 해마다 한맹(寒盟)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 지금의 기림굴(箕林窟)은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삼신상제님을 크게 맞이하는 대영제전(大迎祭典)은 처음 동굴에서 행해졌다. 거기에 구제궁(九梯宮) 조천석(朝天石)이 있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三倫九德之歌)가 있어 이를 부르도록 장려하였다.
조의선인(皂衣仙人)은 모두 선발된 사람인데, 사람들이 삼가 본보기로 삼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들에게 영광을 더하여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광개토제의 성덕과 동방 문명의 종주권 장악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시어,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烈帝 위대한 황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光明殿)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天樂)을 연주했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셨다.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는데 이때도 천악을 쓰셨다.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伏斯買), 우술산(雨述山), 진을례(進乙禮),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셨다. 속리산을 지나시다가,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백제, 신라, 가락(가야)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거란과 평량이 다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任那), 이국(伊國), 왜(倭)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海東)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일본 큐슈에 다라한국을 건국한 협보
이에 앞서 먼저 협보가 남한(南韓)으로 달아나 마한산(지금의 평양)에 은거하고 있을 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때 협보가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서 배를 타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海浦)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狗邪한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이다. 후에 임나와 병합하여 연합정권(聯政)을 세워 다스렸다. 이때 세나라는 바다에 있고, 일곱 나라는 육지에 있었다.
처음에 변진(弁辰) 구야국(狗邪國) 사람이 먼저 들어와서 모여 살았는데 이것을 구야한국(狗邪韓國)이라 하였다.
다파라(多婆羅)를 일명 다라한국(多羅韓國)이라 불렀다. 이곳 사람들은 홀본(忽木)(졸본)에서 이주해 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으므로 늘 고구려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서로 이웃하고 성씨도 같았다. 옛날에는 이곳에 웅습(구마소)성이 있었는데, 지금의 큐슈 구마모토(熊本)성이 바로 그곳이다.
왜는 회계군(會稽郡)동쪽에 있는 동야현(東冶縣)의 동쪽에 있었다. 뱃길로 바다 건너 9천리를 가면 나패(那覇)(나하)에 이르고, 또 일천리를 가면 근도(根島)(네시마)에 이른다. 근도(네시마)를 저도(祗島)(도시마)라고도 부른다.
당시에 구노(狗奴) 사람이 여왕과 서로 다퉈 찾아가는 길을 매우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구야한국으로 가려는 사람은 대개 진도(津島)(쓰시마), 가라산(加羅山), 지가도(志加島)를 거쳐야 비로소 말로호자(末廬戶資)(말로국) 땅에 이를 수 있었다. 그 동쪽 경계가 구야한국 땅이다.
회계산의 역사적 의의와 방사 서복의 일본 이주 과정
회계산은 본래 『신시중경(神市中經)이 소장되어 있던 곳이다. 사공 우(禹)가 석달 동안 재계하고 이 책을 얻어 치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우가 돌을 채취하여 부루태자의 은공을 새겨 산 높은 곳에 세웠다고 한다.
오(吳), 월(越)은 본래 구려(九黎)의 옛 읍이고, 산월(山越), 좌월(左越)은 모두 그 후예가 갈라져 옮겨 살던 땅이다. 늘 왜와 더불어 왕래하고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진(秦)나라 때 서불(徐市)이 동야(東冶)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나하)에 이르고, 종도(種島)(다네시마)를 거쳐 뇌호내해(瀨戶內海)(세도나이카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도착하였다. 이세(伊勢)에는 옛적에 서복의 무덤과 사당이 있었다. 어떤 이는 단주(亶洲)를 서복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20세 장수제, 단기 2746~2824, 413~491)는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시어 웅진강(熊津江) 이북이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북연(北燕) 실위등 여러 나라가 다 같이 입조하여 우리의 형제 족속에 편입되었다.
또 신라의 매금과 백제의 어하라와 함께 남평양(지금의 서울)에서 만나, 공물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를 약정하였다.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21세 문자제, 단기 2824~2852, 491~519)는 연호를 명치(明治)로 고치셨다. 11년(단기 2834, 501)에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우리(고구려)에게 귀속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영토는 점점 넓어졌다.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25세 평원제(平原帝), 단기 2892~2923, 559~590)는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시어 주몽의 기풍이 있었다. 연호를 대덕(大德)으로 바꾸었고, 정치와 교화가 매우 밝아졌다.
대덕 18년 병신(단기 2909, 576)년에 열제께서 대장 온달(溫達)을 거느리고 가서 갈석산(碣石山)을 치고, 추격하여 유린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北周)를 크게 깨뜨리셨다. 이로써 유림진(楡林鎭) 동쪽 땅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의 산서(山西) 경계이다.
선비족 후손인 수 양제의 침략을 격퇴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 (26세 영양제, 단기 2923~2951, 590~618) 때에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족의 후손이다. 양광이 남북을 통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깔보고, 조그마한 오랑캐가 거만하게도 상국(上國)을 업신여긴다 하여 자주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일찍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弘武)25(단기 2947, 614)년에 양광이 또다시 동쪽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먼저 군사를 보내어 비사성(卑奢城)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적이 곧 평양을 습격하려 하거늘, 열제(영양제)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진격을 늦추기 위해 곡사정을 보내려 하셨다. 때마침 조의선인 일인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하므로 함께 진중에 도착하여 양광에게 표(表)를 올렸다.
양광이 배 안에서 표를 손에 들고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일인이 소매 속에서 작은 쇠뇌(小弩)를 꺼내 쏘아 가슴을 맞혔다. 양광이 놀라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우상 양명이 양광을 업게 하여 급히 작은 배로 옮겨 타고 물러나서, 회원진(懷遠鎭)으로 철병하기를 명하였다. 양광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작은 나라를 치다가 졌으니, 이것이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양명 등은 얼굴빛이 검게 변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뒷 사람이 이 일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아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너희 한나라 아이들아!
요동을 향해 헛된 죽음의 노래를 부르지 말지라.
문무에 뛰어나신 우리 선조 환웅이 계셨고
면면히 혈통 이은 자손, 영걸도 많으셨네.
고주몽성제, 태조무열제, 광개토열제께서
사해에 위엄 떨치시어 공이 더할 나위 없네.
유유 일인 양만춘은 저들이 얼굴빛 변하며 스스로 쓰러지게 하였네.
세계에서 우리 문명이 가장 오래고
바깥 도적 쫓아 물리치며 평화를 지켜 왔으니,
저 유철(한 무제) · 양광(수 양제) • 이세민(당 태종)은
풍채만 보고도 무너져 망아지처럼 달아났구나.
광개토열제 공덕 새긴 비석 천자(尺)나 되고
온갖 깃발 한 색으로 태백산처럼 높이 나부끼누나.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 장군의 큰 공적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월 16일(대영절)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단기 2945, 612)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 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지금의 하북성 창려)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천7백 명이었다.
양광이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구걸하였으나 을지문덕이 듣지 않았고, 열제(영양제) 또한 추격하도록 엄한 명을 내리셨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곧바로 몰아붙여, 한 갈래는 현도 길로 태원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樂浪)길로 유주(幽州)에 이르러,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가서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모아 안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안, 건창(建昌), 백암(白岩), 창려(昌黎)등 여러 진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昌平), 탁성(涿城), 신창(新昌), 용도(桶道) 등 여러 진은 여기(如祈)에 속하고, 고노(孤奴), 조양(造陽), 누성(樓城), 사구을(沙溝乙)은 상곡(上谷)에 속하고, 화룡(和龍), 분주(汾州), 환주(桓州), 풍성(豊城),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하게 되어 모두 옛 제도에 따라 관리를 두었다. 이때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영토는 더욱 커졌다.
양광이 임신(단기 2945, 612)년에 쳐들어올 때, 전에 없이 많은 군사를 몰고왔으나 우리는 조의(皂衣) 20만으로 적군을 거의 다 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 같은 사람은 한 시대의 흐름을 지어내는 만고에 드문 거룩한 영걸이다. 뒤에 문충공 조준(趙浚)이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함께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 빛 띠는데
옛적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구나.
지금도 어부와 나무꾼에게 그때 이야기 남았건만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
고구려 백제의 통치 영역과 수 문제의 대침략
옛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홍무 9년(단기 2931, 598)에 열제께서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摠菅) 위충(韋冲)을 사로잡아 죽이셨다.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과 호구수를 정리하고, 왕의 작위(王爵)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準)하여 하게 하였다.
명치(明治) 연간에 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권익 집행을 고구려 조정에서 하게 되었다. 성읍의 구획을 짓고 문무 관리를 두었다. 그 후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남북에서 사변이 생기고 사방에서 소요가 일어나 그 피해가 생민에게 미치게 되었다. 열제께서 크게 노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하시니, 사해 안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 왕 양견(楊堅)은 속으로 앙심을 품고 감히 원수를 갚겠다고 군사를 내어, 은밀히 위충을 보내 총관이라는 이름으로 관가를 파괴하고 읍락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을 보내어 도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시니 산동 지역이 평정되고 해성(海城)이 평온해졌다.
이해(단기 2931,598)에 양견이 또다시 양량(楊諒), 왕세적(王世績) 등 30만 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요택(遼澤)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周羅緱)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登州)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後陣)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다가,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
고구려 좌장(左將) 고성(高成)이 몰래 수나라와 친하려는 마음을 품고 은밀히 막리지의 북벌 계획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성은 여러 번 군대를 보낼 것을 청원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공을 세웠다. 그러나 막리지가 홀로 힘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쪽은 지키고 북쪽을 치는 계책을 강하게 고수하여 여러 번 이해를 따져 말하므로, 이를 따르게 되었다.
연개소문의 강렬한 주체 정신
고성(27세 영류제)이 즉위하자 이전의 열제들이 남긴 법을 모두 버리고 당에 사신을 보내어 노자상(老子像)을 구해 와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노자 도덕경 강론을 듣게 하셨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시어 장성을 쌓는데 부여현에서 남해부까지 그 거리가 천여 리였다.
이때에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그만두도록 청원하고, 또 장성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이해를 따져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이 매우 언짢게 생각하여 연개소문의 군사를 빼앗고,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비밀리에 여러 대인(大人)과 함께 연개소문을 주멸하려고 의논하셨다.
연개소문이 이 일을 먼저 전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겠는가? 일이 급박하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 하고, 휘하 군사를 모두 모아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열병식을 보자고 하니 모두 참석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범과 이리가 문 가까이 왔거늘, 나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이려 하는가?” 하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임금이 변고를 전해 듣고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다가 송양(松壤)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병사를 모집하셨으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하시고 말았다.
연개소문의 생애와 대인의 풍모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연개소문은 홍무 14년(26세 영양제, 단기 2936, 603) 5월 10일에 태어났고 아홉 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하사 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고,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한 온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딴 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스러운 호걸이었다.
연개소문이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줄 모른다” 하니, 무리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해(滄海)의 용신(龍神)이 다시 화신(化身)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고성제(27세 영류제)를 내쫓고 무리와 함께 고장(高臧)을 맞이하였다. 이분이 보장제(寶臧帝)(28세, 단기 2975, 642~단기 3001,668)이시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 되었다. 또한 세 마을(三忽)에 전(佺)을 두고 조의선인(皂衣仙人) 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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