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 남강공 (영간)
남강공 김영간 중시조
출생: 충주 남양(1468-1534)
시조: 김수로왕 후손 김녕군 김목경 후예 부친은 이조참판(종2품)
경력: 28세(1496년), 과거시험(문과)급제.
평해군수, 황해도 관찰사,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락육재, 서원 운영.
가족관계: 4남 4녀.
장남: 여준(참봉공), 차남: 서인(진사공), 삼남: 몽준(임은공), 사남: 억준(담헌공).
호계사(虎溪詞)
1515년(중종10년) 중종 왕비 단경황후 신씨 복위 상소사건 장흥으로 유배,
후학을 양성하다, 여생을 마치신 남강공 김영간 중시조님을 위한 사당임.
단향제(檀享祭) 향사
1842년(헌종8년) 성균관 유생들이 김영간 중시조님의 절의가 곧고 높음을 추모하기 위해 광주유림을 통해 장흥유림에서 매년 음력 9월 15일 향사를 행행합니다.
호계사
이 사당은 중종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 복위(復位)를 논(論)하는 상소(上疏)사건으로 1515년(중종10년)에 장흥으로 유배되어 후학을 양성하시다 여생을 마치신 남강(南崗) 김영간(김영간:1468-1534)중시조님의 사우(詞宇:사당)이다.
이 사당이 건립된 것은 중시조님께서 타게하신지 300여년이 지난 1831년이 지난 1831년(순조31년)에 중시조님의 후손 김택노(金宅魯)등의 상소로 조정에서는 그 해에 중시조님의 억울한 죄명이 풀리고 관직이 회복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종2품직) 겸 오위도총관(伍衛都摠管:현재 합창의장)으로 추종 되었다.
1842년(헌종 8년)에 성균관 유생(儒生) 강충영(姜忠永), 유관(柳瓘)등이 남강 김영간 중시조님의 절의가 곧고 높음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고 향사(享祀)하려고 호남 유림에 통문했다. 광주(壙州)유림 박철휴(朴徹休), 고시대(高時大)등이 장흥유림에게 통보했고 장흥유림들은 그 의견을 발이하여 남강 중시조님의 사우(祠宇)를 부산면 호계리 마을에 건립하고(부산면 유림회장 김명중 구술) 호계사(虎溪祠)라 했다.
이때 강당도 세웠으며 양쪽 협실 마루를 침계량(枕溪廊)이라 이름 했다.
당시 예성축문(禮成祝文)은 진원(珍原人) 박인환(朴寅煥)이, 상량 축문은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진무사(鎭撫使) 안동(安東人) 권대긍(權大肯)이, 호계사 기문(記文)는 2년 뒤인 오성(筽城) 김확(金瓁)이 각각 지었다.
1868년(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 따라 훼철(毁撤)당하고, 1899년(광무원년)에 중시조의 묘소(해동사 앞산)아래 제각을 중수(重修)했는데 추진 유사는 후손 김풍식(金豊植), 김현근(金炫根)이며, 중수기문(重修記文)은 후손 김풍식과 영광(靈光人) 김경현(金擎鉉)이 지었다. 현재 사당 신실(神室: 호계사)은 1931년에 복설(復設)했고 매년 음력 9월 15일에 향중(鄕中) 유림들이 배향하고 있으며, 강당 추모재(追慕齋)는 1979년 중건했다.
단경왕후 신씨 복위
폐비 신씨(愼氏)로 불리다가 신씨가 죽은 뒤 182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년)에 진성대군(중종)의 첫 번째 아내이자 조강지처라는 명분 때문에 중종 왕비로 복위되어 단경왕후(端敬王后: 1488-1544)라는 시호를 받게되었고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던 신씨의 무덤이 온통(溫陵)으로 승격되어 왕비의 격식에 맞게 릉을 조성했다. 신씨는 신수근의 딸로 13살이었던 1499년(연산군 5년)에 연산군의 이복 동생인 지성대군(훗날 중종)에게 시집을 갔다. 연산군의 포악한 학정이 극에 달하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1506년(연산군 12년)에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고 성종의 둘째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사건이 중정반정이다.
이 때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중종)의 장인이며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 신수근인데 박원종을 중심으로 한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수근을 살해하고 반정을 성공시킨 후 신수근의 딸이자 중종비인 신씨를 두었다가 후환이 두려워 중종에게 신씨 폐위(廢位)를 강요하여 신씨는 왕비에 오른 뒤 7일 만에 배출되었고 박원종의 조카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왕비(장경왕후)에 올렸다. 장경왕후 윤씨는 1515년(중종10년)에 사망하게 되자 다시 신씨의 왕비 복귀가 거론되었고,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령 유옥은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왕비로 복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려 모두 유배되었다.
남강 김영간 중시조
본관은 김해(金海), 자(字)는 정지(挺之), 호는(號)는 남강(南崗)이다.
김영간(1468-1534)중시조님은 김수로왕(金首露王) 후손 김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후예 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종2품) 김진백(金震白)dlau, 어머니는 경주김씨(예조참판 김문형의 딸)이다. 1468년(세조14년)에 충주 남양리에서 태어 나셨다.
문경공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496년(연산군 2년) 28세에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치다 국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업무를 맡은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 종4품직)으로 승진 되었을 때 연산군의 폭정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한 시대여서 환멸을 느껴 벼슬을 내놓고 경기도 광주(廣州) 남한촌(南漢村)으로 내려와 세상일을 잊고 살았다.
1506년(연산군 12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중종 임금의 특별한 뜻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승급되었고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으며 평해(平海)군수, 무산(茂山)부사, 황해도 관찰사,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셨다.
1509년(중종4년)에 관직을 사직하시고 고향(청주)으로 돌아와 지내시다가 1515년(중종10년) 3월에 담양부사 눌재(訥齋) 박상(박상: 1474-1530), 순창군수 충암(沖菴) 김정(金淨:1486-1521) 무안현령 석헌(石軒) 유옥(柳沃: 1487-1519)과 함께 원래 조강지처를 내치는 것 자체가 유교 문화에서는 금기사항이라고 상소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 복위를 주장하고 또한 박원종(朴元宗: 1467-1510), 성희안(成希顔: 1461-1513), 유순전(柳順汀: 1459-1512) 등 3훈신(勳臣)이 중종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를 내쫓는 죄를 바로 잡기를 청했으나 대사현 권민수(權敏手: 1466-1517), 대사간 이행(李荇:1478-1534)등이 반대로 실패하게 되자 같은 해 정암(晶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맡은 직책에서 물러났고, 김영간 중시조께서는 영의정 鄭光弼(정광필: 1462-1538)의 구제노력으로 참형을 피하고, 삭탈관직(削奪官職)된 후 장흥도호부 벽사도(碧沙道) 찰방(察訪: 정6품직, 현 교통 통신기관)이 관할하는 곳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중시조계서는 현재 장흥읍 축내마을 저수지 윗편에 서원을 짓고 “낙육재(樂育齋)” 라 현판하고 후진을 양성할 때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0-1545)과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1502-1584)등이방문했다.
관련유적으로는 장흥읍 축내리에 남강 김영간 중시조님 후학을 양성했던 낙유재(樂育齋)터(부지)가 있고, 장동면 만수마을 입구에는 1899년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4-1907) 선생이 지은 <남강 중시조 신도비(神道碑: 정2품 이상 관리로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업적을 기록한 비석)>가 있으며, 해동사 앞 호계사 사우(사당)입구에는 1983년에 세운 <호계사 묘정비(廟庭碑)>가, 장흥읍 운치마을 입구에 <김해김씨 경파(京派) 남강공 중시조님 유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1898년 8월 후손 김제후 등이 주도하여 남강 김영간 중시조 유고집을 간행했는데 정의림(鄭義林: 1845-1910) 선생이 시문을 쓰고 박인환(朴寅煥)이 발문(跋文)을 붙였다. 유고집 권1에 시 2수와 단경왕후 신씨 복위소(復位疏)가 수록되어 있다.
전해지는 시 한 구절을 국역하여 소개합니다.
“잠깐 기울다 다시 바르게 된 연잎엔 빗방울이 뒹굴고
어느새 갔다 다시 돌아온 제비는 새끼를 이끌고 오는구나.”
권2-권4에는 부록으로 연보, 호계사 축문과 기문,
가장, 묘갈명, 신도비명, 복직 상언 등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