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역사
시조대왕 떠나신 후의 가락국기
2세 도왕(道王)
시조 김수로왕의 태자(太子)이시다. 어휘(御諱)는 거등(居登)이시다. 재위 원년 기묘(199)년 3월 23일에 즉위하시어, 계유(253)년 9월 17일에 훙(薨)하시니, 재위는 54년이시다.
도왕후(道王后) 신씨(申氏)의 휘(諱)는 모정(慕貞)이시니, 천부경(泉府卿) 보(輔)의 따님이시다.
3세 성왕(成王)
도왕(道王)의 태자(太子)이시니, 어휘(御諱)를 마품(麻品) 또는 마품(馬品)이라고 하시다. 재위 원년은 계유(253)년 9월 17일에 즉위 하시어 신해(291)년 정월29일에 훙하시니, 재위는 38년이시다.
성왕후(成王后) 조씨(趙氏)의 휘(諱)는 호구(好仇)이시니, 종정감 광(宗正監 匡)의 손녀이시다.
4세 덕왕(德王)
성왕(成王)의 태자이시니, 어휘를 거즐미(居즐彌) 또는 금물(今勿)이라고 하시다. 재위 원년은 신해(291)년 정월 29일에 즉위 하시어, 병오(346)년 7월 8일에 훙하시니, 재위는 55년이시다.
덕왕후(德王后)의 휘는 아지(阿志)이시니, 아간(阿干) 아궁(阿躬)의 손녀이시다.
5세 명왕(明王)
덕왕의 태자이시니, 어휘를 이시품(伊尸品) 또는 이품(伊品)이라고 하시다. 재위 원년은 병오(346)년 7월 8일에 즉위하시어, 정미(407)년 4월 10일에 훙하시니, 재위는 61년이시다.
명왕후(明王后)의 휘는 정신(貞信)이시니,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따님이시다.
6세 신왕(神王)
명왕의 태자이시니, 어휘는 좌지(坐知) 또는 금즐(金즐) 혹은 금토(金吐)라고 하시다. 재위 원년은 정미(407)년 4월 10일에 즉위하시어, 신유(421)년 5월 12일에 훙하시니, 재위는 14년이시다.
신왕후(神王后)의 휘는 복수(福壽)이시니, 대아간(大阿干) 도녕(道寧)의 따님이시다.
7세 혜왕(惠王)
신왕의 태자이시니, 어휘는 취희(吹希) 혹은 즐가(즐嘉) 또는 금희(金喜)라고 하시다. 재위 원년은 신유(421)년 5월 12일에 즉위하시어, 신묘(451)년 2월 3일에 훙하시니, 재위는 30년이시다.
혜왕후(惠王后)의 휘는 인덕(仁德)이시니, 각간 진시(角干 進思)의 따님이시다.
8세 장왕(莊王)
혜왕의 태자이시니, 어휘는 질지(銍知) 혹은 금질(金銍)이라고도 하시니, 재위 원년은 신묘(451)년 2월 3일에 즉위하시어, 임신(492)년 10월 4일에 훙하시니, 재위는 41년이시다.
장왕후(莊王后)의 휘는 방원(邦媛)이시니, 사간 금상(沙干 金相)의 따님이시다.
9세 숙왕(肅王)
장왕의 태자이시니, 어휘는 겸지(鉗知) 혹은 금겸(金鉗)이라고 하시다. 재위 원년은 임신(492)년 10월 4일에 즉위하시어, 신축(521)년 4월 7일에 훙하시니, 재위는 29년이시다.
숙왕후(肅王后)의 휘는 숙(淑)이시니, 각간 출충(角干 出忠)의 따님이시다.
10세 양왕(讓王)
숙왕의 태자이시니, 어휘를 구형(仇衡) 또는 구해(仇亥) 혹은 구차휴(仇次休)라고 하시니, 재위 원년은 신축(521)년 4월 7일에 즉위하시어, 재위 12년 임자(신라 법흥왕 19년, 고구려 안원왕 2년, 백제 무녕왕 10년(서기 532)에 이르러서 신라에 병합하니, 가락국의 역년은 무릇 491년이시다.
능(사적 제214호)은 지품천현(지금 산천) 서쪽 20리를 상거한 왕산하의 경좌(東向)에 있으니, 돌로써 쌓아올린 이 적석총은 사면이 칠급이요 높이는 10여척이다. 지금 산천군 금서면 화계리 산70번지의 능림면적은 123정 5반1묘이다. 능하에서 북으로 2리쯤 되는 화계리 370번지 613평에는 덕양전 영정각을 위시하여 15동에 46간의 건물이 있으니 매년 음력으로 3월 17일과 9월 17일에 춘추 제향을 받들어 모신다.
왕산 주변에는 왕대암지, 왕산사지, 흥무왕 사대지, 함양군 마천면 영승리의 사능산등 가락국과 유서 깊은 고적이 허다하게 전하고 있다.
양왕후(讓王后) 휘는 계화(桂花)이시니, 이즐금인 분즐수의 따님으로 덕양전에 합사(合사)하여 향례를 받는다. 왕자 3분을 탄생하시니 장자는 세종(世宗)이시오, 이자는 무력(武力)이시오, 삼자는 무덕(武德)이시니, 신라에 들어가서 벼슬이 각간(1등관)에 이르시다.
가락국이 신라에 귀속된 후에 대대로 고을 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신라 제三十一대 정명왕(政明王 : 神文王)이 즉위한 開耀元년 신사(六人一)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여 태수(太守)를 두었고 그후 二百五十九년에 우리 고려태조(太祖)께서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한 후에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해서 배안사(排岸使)를 둔 것이 四十八년 이다. 다음에 임해군(臨海郡)이라 하였고 혹은 임해부(臨海府)라 해서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둔 것이 二十七년이며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은 六十四년 이었다。
벌받아 죽은 양전사 조문선
순화2년 고려 성종10년(991)에 김해부 양전사인 중대부 조문선은 조사 보고했다.
『수로왕 능묘에 소속된 왕위전의 면적이 많습니다. 마땅이 심오결은 그 전대로 두고 그 나머지 십오결(十五結)은 김해부에 요역을 맡은 호정(戶丁)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관 관서(官署)에서 그 보고서를 전해 아뢰니 당시 조정에서 지령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난(黃金卵)이 화하여 성군(聖君)이 되시었고 왕위에 계시어 연령이 一百五十八세나 누렸으니,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만한 이가 드물다。세상을 떠나 신 후 선대(先代 : 新羅文武王)로부터 왕묘(王廟)에 소속됐던 왕위전(王位田)을 지금 감소시키는 것은 진실로 두려운 일이다」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는 또 거듭 아뢰니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겨 그 절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말고 절반만을 김해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는 조정의 지령을 받아 이에 절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절반은 김해부에 요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지급하였다。
거의 이 사무가 끝날 무렵에 다다르자 양전자는 매우 피로하였다。문득 하룻 밤 꿈에 七、八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너는 큰 죄악이 있으므로 베어 죽이겠노라』 양전사는 형벌을 받자 아프다고 하면서 놀라 깨었다。 이내 병이 나서 남에게 알리지 못하고 밤에 도망쳐 갔다. 그 병이 덜하지 않고 관문(關門)을 건너서 죽었다。그렇기 때문에 양전 도장(量田都帳:測量臺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질 않았다。
그 후에 조정의 명령을 받은 사자(使者)가 와서 그 밭을 검사하여 보았더니 十一결(結) 十二짐(負) 九몫(東)으로 부족한 것이 三결 八十七짐 1목이었다. 이에 부족한 면적의 행방을 추궁하여 내외 관서에 보고하였다。조정에서는 칙령으로 그 부족한 면적을 충당하여 주게하였다。
금질왕의 착한 정치
또한 고금으로 탄식한 바 있었다. 원군(元君)의 7대손 금질왕께서 부지련히 정치를 하셨고
또는 매우 진리를 숭상하셨다. 시조모 허황후의 명복을 봉축하기 위하여 원가(元駕)29년 임진(452)에 옛날 시조왕께서 황후와 더불어 결혼 하신 곳에 절을 세우게 하여 액호를 왕후사라고 하셨다. 사자를 보내어 절 근처에 평전 십결을 지정해서 삼보 공야의 비용으로 삼게하셨다.
이 왕후사가 있음으로부터 5백년 이후(고려 관종3년: 952년)에 장유사가 설치 됐는데 받아 들이는 전지와 임야는 모두 삼백결(三百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 上座, 寺主維那)이 왕후사가 장유 소유 임야의 동남쪽 표계(標界)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헐어 없애고 장사(莊舍)를 만들어 추수(秋收) 동장(冬藏)하는 장소와 말 먹이고 소 기르는 외양간을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가락국기 명문
천지가 개벽후에 일월이 밝도다. 인륜은 생겼으나 왕위는 없었도다. 중국은 오래이고 동국은 초창기라. 신라는 먼저이고 가락은 뒤에섰다. 임금은 없었으니 누가 백성을 고찰하리. 하늘은 조화로 창생을 보살폈네. 부명을 수여하여 특히 정영을 보냈네. 산중에 알 내리고 안개속 몸 감추었네. 안으로 아득하고 밖으로 캄캄하여 형상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들리었네. 군중들 노래하고 따라서 춤추었네. 7일 지낸 뒤에 한때는 일이 없었네. 바람불고 구름결에 하늘빛 푸르렀네. 한가닥 자색밧줄에 여섯 둥근알 내리였네. 생소한 지방에서 기와집이 줄비했네. 관람자담과 같고 사모하는자 국그릇 대하듯하네. 5가야왕 각각 돌아가고 한분만이 남으셨네. 때도 같고 자취도 같으며 형같고 제같았네.
하늘이 내신성덕 세상에 정식이 되었네. 보위에 처음 올라 성내를 맑기려 하셨네. 궁궐은 예를 본뜨여 토개평탄 하였네. 만기를 힘쓰시어 서정을 시행하셨네.
평당을 두지않고 오직 정일 하였네. 걷는 사람 길을 양보하고 밭가는 사람 이랑을 양보하네. 사방이 안정하고 만백성 태평하였네. 어느덧 제로가(虀露歌)는 수(壽)를 하시지 못하셨네. 천지기색 변하고 온국민 통곡하네. 금같은 자취 옥소리 떨치었네. 세월은 비롯 흘렀으나 법도는 영원하네.
김해연혁(金海沿革)
옛날 가락국으로 혹은 가야라 하고 뒤에 금관국이라 하였다. 신라 법흥왕(532)년에 금관국이라 하고 문무왕(757)년에 금관소경을 경덕왕(532)때에 김해소경이라 했다. 고려태조(940)년에 김해부를 또 임해현이라 하다가 얼마 후 임해군이라 했고, 광종때에 김해부 성종때에 금주도호부라 했고 현종(1270)년에 금주방어사를 두고 원종 때에 금녕도호부라 하고, 충열왕(1270)년에 금녕현을 뒤에 금주목으로 하고, 충선왕 때에 김해부라 하다가 조선태종(1413)년 때에 김해도호부라 하고 고종(1895)년에 김해군이라 하였다.
가락국사(駕洛國史)
춘삼월에 가락국 김수로 나라를 창립하고 국호를 대가락이라 하다. 시조왕은 금 알에 나왔다 하여 성은 금이요, 휘는 수로라 함. 국경을 정하고 가야 오국을 봉하였다. 뒤에 금관국이라 하였다. 국경은 동으로 황산강까지 동북으로 가야산까지 서남은 바닷가까지 서북은 지리산까지 함.
오가야는 지금의 고령, 고성, 성주, 함안, 함창이라 함. 오가야는 본래 다섯 알 중에서 나왔다 하여 오형제라 함. 서기 44년 갑진 춘이월에 도성을 쌓고 궁궐을 또 세웠다. 사당을 도성 서쪽에 세웠다. 서기 48년 무신 추칠월 병신년에 허씨를 맞아 왕후를 삼고 왕후가 아들 열, 따님 둘을 낳아 2자는 어머니 성 허씨를 주었다. 허씨는 아유타국왕의 따님으로 돌배로 타고 왔다 함. 열아들 중에 한분은 왕이 되고 일곱분은 신선이 되었다. 하고 두 아들은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서기 78년 무인 추팔월 신라 사람 아찬 길문이 아군과 황산에서 싸웠다.
서기 88년 추칠월에 신라인 가소 마두 두 성을 쌓고 우리를 거절 하였다.
서기 94년 춘이월 아군이 신라 마두성을 포위하자 신라장수 아찬 길원이 정병
일천을 거느리고 대항 하므로 아군이 불리하였다.
서기 96년 병신 추구월에 신라를 공벌하자 신라가 가소성주 장세를 보내어 싸우다가 장세는 죽고 신라왕이 대노하여 친히
용병 오천을 거느리고대항하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왔다.
서기 97년 춘정월에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침략하려 하므로 시자를 보내 정지 하였다.
61年 壬寅(서기 102년)
추팔월에 음집벌국이 (월성안강) 실직곡국(삼척)으로 더불어 국경을 다투었다. 신라가 우리에게 해결하기를 청하므로 직결하여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양여시키고 얼마 후에 파멸하였다。
처음에 음집벌 실직곡 두 나라가 국경을 다투어 신라에게 해결을 청하였으나 신라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리 왕을 맞아서 문의하자 왕이 직결하여 주시고 음집벌국이 뒤에 불손하므로 쳐서 항복받았다.
65년병오(서기106년)
추팔월에 신라가 마두성주를 명하여 우리를 침략하였다.
74년 을묘(서기 115년)
춘이월에 신라를 공벌하다。칠월에 신라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를 침략하면서 군사가 황산하를 건너자 우리 매복한 군사가 신라왕을 포위하였으나 신라왕이 포위망을 뚫고 물러갔다。
75년 병진(서기 116년)
추팔월에 신라가 우리를 침략하면서 신라왕이 정병 일만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우리는 성만 고수하다가 마침 비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아 신라군사가 불리하여 돌아갔다。
121년 임인 (서기 162년)
태자 거등이 섭정하고 태왕궁실이 이룩되자 마한유족 五十四국이 와서 하례하고 태왕의 존호를 추앙하였다。
148년 기사(서기 189년)
삼월 일일에 태후허씨 훙하시니 국인이 자기 어머니 여윈것 같이 하여 추모해 마지않았다。후가 아유타국에서 출생하시어 열여섯살에 가락국으로 오셔서 왕후위를 百十五세 태후위를 二十八年 수한이 一百五十七이라 김해 도성 서쪽 구지봉 남쪽에 장례지내고 후능이라 호를 하였다.
158년 기묘(서기 199년)
춘삼월 二十三日에 태왕이 훙하셨다。왕이 임인년에 출생하시어 왕위에 계신지 一百二+년 태왕위에 계신지 三十八년 수한은 一百五十八이라 수능에 장례지내고 국민이 부모를 잃은 것과 같이 하였다。 나라가 없어진 후에도 태로(큰소)로 제사지내고 이조고종 무인년에 승재를 건설하고 참봉을 두고 기자(箕子)능의 예를 본받아 제사를 받들었다.
태자 거등이 왕위에 오르다。 즉 도왕이요 왕의 대에 초현대를 지었다。
여지승람에 초현대는 북동쪽 저근산인데 가락국 거등왕이 칠점산 감시선인을 초청하면 선인은 거문고를 안고 와서 서로 즐기었다는 전설이 있고 왕이 앉았던 연화대석과 바둑판돌이 아직 있다 함。
2년 신사(서기 201년)
춘이월에 신라와 더불어 화친을 하다。
10년 기축(서기 109년)
추칠월에 포상 여덟나라가 우리를 침략하므로 왕자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자 신라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및 이음(利音)을 명하여 군사를 거느려 구원하고 노획된 八千人을 빼앗아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13년 임진(서기 212년)
춘삼월에 왕자를 신라에 인질하였다。
32년 신해(서기 212년)
추칠월에 우리 군사가 신라장수 석우로와 합하여 감문국을 쳐부수었다。
50년 기사(서기 249년)
왜인이 신라를 침벌하여 우로를 죽임으로 우리 군사가 왜를 쳐서 二百급을 참살하다。신라시자 우로(于老)가 가락국을 왔다 가는 도중에 왜인이 잡아 죽이겠다。왕이 듣고 왜를 쳐서 보복하였다。
54년 계유(서기 253년)
추구월에 왕이 훙하시고 세자 마품이 위에 오르다。성왕이다。
38년 신해(서기 291년)
춘삼월에 왕이 훙하시고 세자 거질미 위에 오르셨다。덕왕이다。
6년 정사(서기 297년)년)
이서고국이 신라 금성을 쳐서 패해 돌아가므로 우리 장수를 보내어 쳐 부수었다。
21년 임신(서기 312년)
왜인의 청혼을 받아주지 않고 신라에게 보내니 신라왕이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시집 보냈다.。
55년 병오(서기 346년)
추칠월에 왕이 훙하시고 세자 이시품이 위에 오르시다。명왕이다。
61년 정미(서기 407년)
용녀를 하산도에 물리치니, 하사월에 왕이 흥하시고 세자자 지위에 오르시다。용녀를 하산도에 물리치니 나라가 대치하였다. 왕이 용녀(傭女)를 사랑하고 용녀의 친척을 신임하다가 신라의 침략을 받게 되자 신하 박원도가 간하고 또 점을 쳐서 왕의 그릇됨을 알고 용녀를 하산도로 쫓아보낸 후에 나라가 대치되었다 함.
원년 무신(서기 408년)
왜인이 비로소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다 왜인이 이때부터 접근하였다。
14년 신유(서기 421년)
하 오월에 왕이 훙하고 세자 취희 위에 오르셨다。혜왕이다。
30년 신묘(서기 451년)
춘에 왕이 훙하고 세자 질지 직위하다。장왕이다. 처음 선대왕의 합혼한 지방에 나아가 왕후사를 세우고 밭 十결을 바치어 명복비는 자료를 하였다。
28년 기미(서기 479년)
우리 나라에서 중국 남제에 시자를 보내었다。
30년 신유(서기 481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 북쪽을 침략하여 호명 등 일곱성을 빼앗았다。
우리 군사가 신라와 백제를 합하여 쳐부수고 천여급을 참수하다。
36년 정묘 (서기 487년)
봄에 흰 꿩을 신라에 보내다。 꼬리가 오척이 된다.
41년 임신(서기 492년)
왕이 훙하고 세자 겸지 즉위하시다. 숙왕이다.
14년 병술(서기 506년)
신라가 장수를 보내어 소가야를 멸하니 임인개국으로부터 지금 四百六十五년에 망하였다。그 역사와 계통은 사기에 전함이 없다。이는 고성가야이다。
24년 병신(서기 516년)
신라가 가야를 침략하자 일본이 장수를 보내어 구원하다。이는 고령가야
29년 신축(서기 521년)
왕이 훙하고 자구형이 즉위하다。
2년 계묘(서기 523년)
춘삼월에 북가야 왕이 시자를 신라에 보내여 청혼하므로 왕이 이찬비 조부의 누이로 시집보내었다.
3년 갑진(서기 524년)
추구월에 왕이 신라왕을 북경에 맞았다.
10년 신해(서기 531년)
겨울에 연자루를 헐었다. 왕이 연자루의 우는 소리를 듣고 루를 헐어본 즉 태조왕의 비결이 있는데 연자는 즉 임자이다。임자년에 신라에 양국하여 『역천하지마라』 하였다 함.
11년 입자(서기 532년)
겨울에 왕이 태자 세종에게 전위하고 방장산 태왕궁에 계시다가 돌아가시니 시호는 양왕 세종이 세제 무력에게 선위하고 태왕궁에 들어가 세상을 버리고 무력이 왕위에 즉위하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국 김구해(仇亥)왕이 왕비 및 세 아들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함께 와서 양국을 하므로 예로 맞아 상위를 주고 본국을 식읍을 봉하고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하였다。
가락국기에는 신라 제二十四王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벌하므로 왕이 군사가 적어서 감당치 못할 줄을 알고 동생 탈지는 본국에 머물게 하고 왕자와 왕손 솔지 등을 신라에 항복하게 하였다 하다.
무오(서기 538년)
백제는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부여라 하다。신라가 아시량국을 멸하고 그 땅을 군을 만드니 이가 아라가야라 처음 가락이 오가야국을 봉할 때부터 이에 이르기 까지 四百九十七년에 망하였다。
임신(서기 552년)
악사 우륵은 명하여 악기를 만들었다. 사기 기록은 가야국왕 가실(嘉悉)이 十二현금(十二絃琴)을 만들어 十二월의 율려(律呂)를 상증하고 악사 우륵에게 『곡조(曲)를 재정하라』 하였다。나라가 어지러지자 우륵이 악기를 안고 신라에 들어가므로 신라왕이 그 악의 소리를 듣고 가야금이라 이름하였다 함。
임오(서기 562년)
가락국왕 김무력이 나라를 신라에 양여하자 신라 진흥왕이 손님의 예로 대우하고 뒤에 가락을 금관소경이라 하여 식읍을 봉하고 선대제사를 받들게 하고는 무력을 신주대총관 벼슬을 주어 뒤에 각간까지 이르고 九十에 돌아가시므로 가락은 없어졌다。직위를 쓰지 않는 것은 사기가 유실 함이다. 국초부터 종묘를 세우고 제사법도는 중춘과 중하 단오 동지를 소중이 여겼으니 그 풍속이 아직 전하고 있다.
가을에 가락이 복국하기를 꾀하자 신라장수 이사부가 공격하므로 제신이 이기지 못하여 다 죽고 가락국이 다 되였다。태조왕 임인년 개국으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十一세 十二왕으로 역년은 五百二十一년이다。
<김해김씨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