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 (고조선 말기)

북부여 (고조선 말기)


북부여기 상(北夫餘記 上)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해모수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6959, 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E 239)년이다. 임금께서는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같았다. 23세에 천명을 좇아 내려오시니, 이때는 47세 고열가단군 재위 57년(단기 2095)으로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임금께서 응심산(熊心山)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을 지으셨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劒)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시고, 날이 저물면 하늘의 뜻에 따르셨다. 이 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2년 계해(단기 2096, BCE 238)년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에 임금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시고, 연호법(烟戶法)을 만들어 백성을 살피셨다. 오가(五加)의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둔전(屯田)으로 자급하게 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셨다. 재위 8년 기사(단기 2102, BCE 232)년에 임금께서 무리를 거느리고 옛 수도에 가서 오가를 설득하시니, 오가가 드디어 공화정(共和政)을 철폐하였다. 이때 나라 사람들이 단군으로 추대하여 받드니, 이분이 바로 북부여의 시조이시다.겨울 10월에 태아를 가진 임신부를 보호하는 법(公養母之法)을 만들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태교부터 시작하게 하셨다.

11년 임신(단기 2105, BCE 229)년에 북막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한 뒤 돌아갔다.

재위 19년 경진(단기 2113, BCE 221)년에 기비(箕丕)가 훙서(薨逝)하자 아들 준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조선 왕으로 책봉되었다. 임금께서 관리를 파견해 군대를 감독하게 하여 연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데 더욱 힘쓰게 하셨다. 이에 앞서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번조선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다.

재위 20년 신사(단기 2114, BCE 220)년에 임금께서 백악산 아사달에서 천제를 지내도록 명하셨다. 7월에 궁궐 366칸을 새로 짓고 이름을 천안궁이라 하였다. 재위 22년 계미(단기 2116, BCE 218)년에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나라 사람 장량(張良)(?~BCE186)과 함께 박랑사(博狼沙)에서 진왕(秦王) 정(政)을 저격하였으나 수행하던 수레를 잘못 맞혔다.

재위 31년 임진(단기 2125, BCE 209)년에 진승(陳勝)이 병사를 일으키자 진(秦)나라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이에 연,제,조나라 백성 가운데 번조선으로 망명해 온 자가 수만 명이었다. 준왕이 곧 상·하 운장에 나누어 수용하고 장수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재위 38년 기해(단기 2132, BCE 202)년에 연나라 노관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동쪽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재위 45년 병오(단기 2139, BCE 195)년에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이 우리나라에 망명을 구하였다. 임금(해모수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병이 들어 능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번조선 왕 기준이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마침내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 운장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이 해(환기 7003. 신시개천 3703. 단기 2139, BCE 195) 겨울에 해모수단군께서 붕어하시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태자 모수리(募漱離)께서 즉위하셨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25년

모수리단군의 재위 원년은 정미(환기 7004, 신시개천 3704, 단기 2140, BCE 194)년이다. 번조선 왕 기준이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일찍이 백성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모두 풍요롭고 생활이 넉넉하였다. 후에 기준(箕準)이 떠돌이 도적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오가의 무리가 상장(上將) 탁(卓)을 받들고 대규모로 여정에 올라 곧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곳이다. 이를 일러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이때 변한과 진한도 각각 그 백성과 함께 백리 땅에 봉함을 받아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변한,진한은 모두 마한의 정령을 따라서 그대로 행하고 세세토록 배반하지 않았다.

재위 2년 무신(단기 2141, BCE 193)년에 임금께서 상장 연타발(延佗勃)을 보내 평양(平壤)에 성책(城柵)을 세워 도적 위만을 대비하게 하셨는데, 위만도 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겨서 다시는 침노하여 어지럽히지 않았다.

재위 3년 기유(단기 2142. BCE 192)년에 임금께서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부속시켜 아우 고진(高辰)(해모수의 차남, 고주몽의 증조부)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다. 이때 중부여(中夫餘) 사람들이 모두 식량 조달에 참여하였다.

겨울 10월에 수도와 지방을 나누어 지키는 법(京鄕分守之法)을 제정하여 수도는 천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위수를 총괄하고, 지방은 사방 네 개 구역(四出)으로 나누어 (오가가) 진수(鎭守)하게 하셨다. 그 모습이 마치 윷놀이에서 말판 싸움을 보는 듯했으며, (천지의 창조 설계도인) 용도(龍圖)로써 변화의 법칙을 알아내는 것과 같았다.

재위 25년 신미(환기 7028, 신시개천 3728, 단기 2164, BCE 1700)년에 모수리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해사(高奚斯)께서 즉위하셨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고해사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신(환기 7029, 신시개천 3729, 단기 2165. BCE 169)년이다. 정월에 낙랑왕 최숭이 해성에 곡식 3백 석을 바쳤다. 이에 앞서 최승은 낙랑산(樂浪山)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에 이르러 왕검성포에 도읍하였다. 이때는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오(BCE 195)년 겨울이었다.

재위 42년 계축(단기 2206, BCE 128)년에 임금께서 친히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려성에서 도적 위만을 격퇴하고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셨다.

재위 49년 경신(환기 7077, 신시개천 3777, 단기 2213, BCE 121)년에 일군국에서 사절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이 해 9월에 고해사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우루(高于婁)께서 즉위하셨다.

4세 단군 고우루(일명 해우루) 재위 34년

고우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유(환기 7078, 신시개천 3778, 단기 2214, BCE 120)년이다.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우거(右거)를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게 하셨는데, 고진이 점차 병력을 증강시키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능히 우거의 침입에 대비하여 공을 세웠다. 고진의 벼슬을 높여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으셨다.

재위 3년 계해(단기 2216, BCE 118)년에 우거의 도적떼가 대거 침략해 왔다.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전부 약탈당하고 점령되었다.

재위 4년 갑자(단기 2217, BCE 117)년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해성을 공격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한무제의 위만정권 침입(BCE 109~BCE 108, BCE 109)년,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때 한무제가 좌(左)장군 순체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육로로, 누선(樓船)장군 양복에게 수군 7천을 보내 바닷길로 위만정권의 수도 왕험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한나라는 초기에 패하였으나 1년이 넘는 교전 끝에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였다(BCE 108). 한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 북부여로 쳐들어왔으나 서압록 출신 고두막한이 거병하여 한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고두막한은 졸본에 나라를 열어 (BCE 108)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이라 칭하였다.

재위 6년 병인(단기 2219, BCE 115)년에 임금께서 친히 정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해성을 격파하고, 계속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셨다. 이로써 구려하(九黎河)(지금의 요하) 동쪽이 전부 항복하였다.

재위 7년 정묘(단기 2220, BCE 114)년에 임금께서 좌원에 목책을 설치하고 남려에 군대를 배치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셨다.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나라 유철(劉徹)(무제)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解夫婁)가 즉위하였다.

동명왕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어 계속 위협하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몹시 난감하였다. 이때 국상 아란불이 주청하기를 “통하(通河) 물가에 가섭원이란 곳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 권유하여 마침내 도읍을 옮기니, 이 나라를 가섭원 부여(迦葉原夫餘), 혹은 동부여(東夫餘)라 한다.

북부여기 하(北夫餘記 下)

5세 단군 고두막(일명 두막루) 동명왕 재위 22년, 북부여 단군 재위 27년

고두막단군의 재위 원년은 계유(환기 7090, 신시개천 3790, 단기 2226, BCE 108)년이다. 이때는 북부여 고우루단군 13년이다. 임금께서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영준하며 용병(用兵)을 잘 하셨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하면서 한나라 도적이 불길처럼 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개연히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셨다.
이에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고열가(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군)의 후예라 말한다.

재위 3년 을해(단기 2228, BCE 106)년에 임금께서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돌리니 이르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 달이 채 안 되어(不旬月) 군사가 5천명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다 한나라 도적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望風) 스스로 무너졌다. 임금께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계속 추격하여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에 이르셨다.
그곳은 바로 옛 고리국東國 땅이다.

재위 22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이 해는 4세 고우루단군 34년이다.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고, 유민과 합세하여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연달아 쳐부수었으며, 그 수비 장수를 사로잡아 방비를 갖추어 적을 막기에 힘쓰셨다.

재위 23년 을미(단기 2248, BCE 86)년에 북부여가 성읍을 바쳐서 항복하고 왕실만은 보존시켜 주기를 여러 번 애원하였다. 고두막단군께서 들어 주시어, 해부루의 봉작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으로 이주해 살게 하셨다. 임금께서북 치고 나팔부는 악대를 앞세우고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도성에 입성하셨다. 나라 이름을 여전히 북부여라 칭하셨다. 가을 8월에, 한나라 도적과 여러번 서압록하(西鴨綠河) 강가에서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셨다.

재위 30년 임인(환기 7119, 신시개천 3819, 단기 2255, BCE 79)년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차릉(岔陵)에서 태어났다.

재위 49년 신유(환기 7138, 신시개천 3838, 단기 2274, BCE 600)년에 고두막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 장사를 지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께서 즉위하셨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고무서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7139. 신시개천 3839, 단기 2275. BCE 59)년이다. 임금께서 졸본천에서 즉위하셨다. 부로들과 더불어 백악산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천제를 지내셨다.

여러 가지 사례를 반포하여 널리 행하게 하시니 안팎에서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임금께서는 태어날 때 신령스러운 덕을 갖추시어 능히 주술(呪術)로써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시며(呼風雨), 자주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시니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解慕漱)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이때에 한나라 도적이 요하(遼河) 동쪽에서 분란을 일으키므로 여러 번 싸워서 승리를 거두셨다.

재위 2년 계해(환기 7140, 신시개천 3840, 단기 2276, BCE 58)년에 임금께서 순행하시다가 영고탑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으셨다.
겨울 10월에 고무서단군께서 붕어하셨다. 고주몽이 유명을 받들어 대통을 이으셨다.
이에 앞서 고무서단군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이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보시고 공주와 맺어 주어 아내로 삼게 하셨다.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당시 나이 23세였다.

당시 동부여 사람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주몽이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친구의 의를 맺고 함께 길을 떠났다. 차릉수(忿陵水)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뒤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두려워하여 강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천상 상제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오늘 달아나는 길인데 쫓는 자가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하리까?” 하니, 물속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수없이 떠올라 다리가 되었다. 주몽이 물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졌다.

가섭원부여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시조 해부루왕의 재위 원년은 을미(환기 7112, 신시개천 3812, 단기 2248, BCE 86)년이다. 왕이 북부여의 제재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가섭원을 차릉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토지가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였는데, 특히 보리가 많이 났다. 또 호랑이,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에 좋았다.

재위 3년 정유(단기 2250, BCE 84년에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구휼을 베풀고 원근의 유민을 불러 위로하며,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게 하였다. 또 밭을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니, 몇 해 지나지 않아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때를 맞추어 비가 내려 차릉을 축축이 적시므로 백성이 왕정춘正春」이라는 노래를 불러 왕을 찬양하였다.

재위 8년 임인(단기 2255, BCE 79)년, 이에 앞서 하백의 딸 유화가 밖에 나가 놀다가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의 꾐에 빠졌다. 고모수는 강제로 유화를 압록강변에 있는 궁실로 데려가 은밀히 정을 통하고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중매도 없이 고모수를 따라간 것을 꾸짖고 먼 곳으로 쫓아 보냈다. 고모수의 본명은 불리지인데 혹자는 고진(북부여 2세모수리단군의 아우)의 손자라 한다.

해부루왕이 유화를 이상하게 여겨 수레에 태워 환궁하여 궁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해 5월 5일, 유화 부인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고주몽이니 골격이 뚜렷하고 늠름하며 위엄이 있었다. 나이 겨우 7세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을 쏘면 백 번을 다 맞추었다. 부여 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하므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재위 10년 갑진(단기 2257, BCE 77)년이었다. 해부루왕이 늙도록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하루는 산천에 후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더니 그 앞에 마주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 보게 하였더니, 거기에 한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과인에게 대를 이을 아들을 내려 주신 것이로다” 하고,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금와라 하였는데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재위 28년 임술(단기 2275. BCE 59)년에 사람들이 고주몽을 나라에 이롭지 않다고 여겨 죽이려 하였다. 이에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제를 건너 졸본천에 도착했다. 이듬해 새 나라를 여시니,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재위 39년 계유(환기 7150, 신시개천 3850, 단기 2286, BCE 48)년에 해부루왕이 훙서(薨逝)하였다. 태자 금와가 즉위하였다.

2세 금와 재위 41년

금와왕의 재위 원년은 갑술(환기 7151, 신시개천 3851, 단기 2287, BCE 47)년이다.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재위 24년 정유(단기 2310, BCE 24)년에 유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고구려에서는 위병(衛兵) 수만 명으로 호위하게 하여 영구(靈柩)를 졸본으로 모셔 와서 장사를 지냈다. 주몽 성제께서 황태후의 예로써 모후의 영구를 모셔 와 능(陵)을 조성하고 그곁에 묘사를 지으라 명하셨다.

재위 41년 갑인(환기 7191, 신시개천 3891, 단기 2327, BCE 7)년에 금와왕이 훙서하였다. 태자 대소帶가 즉위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

대소왕의 재위 원년은 을묘(환기 7192, 신시개천 3892, 단기 2328, BCE 6, 고구려 2세 유리명열제 14)년이다. 봄 정월에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자를 볼모로 교환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 열제(烈帝)(2세 유리명열제)께서 태자 도절(鄒切)을 볼모로 삼으셨는데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노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졸본성을 쳐들어갔으나 큰 눈이 와서 얼어 죽는 군사가 많아 물러났다.

재위 19년 계유(단기 2346, CE 13)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학반령(鶴盤嶺)밑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재위 28년 임오(단기 2355, CE 22, 고구려 대무신열제 5)년 2월에 고구려가 국력을 다하여 쳐들어왔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다가 왕이 탄 말이 진구렁에 빠져서 나올 수가 없었다. 이때 고구려 상장 괴유가 곧장 나아가 왕을 죽였다.
부여군은 오히려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마침 짙은 안개가 7일 동안 계속되자 고구려 열제께서 밤을 틈타 군사를 비밀리에 움직여 포위망을 벗어나 샛길로 달아나셨다.

여름 4월, 왕의 아우가 추종자 수백 명과 더불어 길을 떠나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렀다. 마침 사냥 나온 해두국왕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하여 갈사수(曷思水)가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일컬었다. 이 나라가 바로 갈사국(갈사부여)이다.

고구려 6세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단기 2401. CE 68)년 8월에 이르러 도두왕(갈사국 3세)이 고구려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니, 시조로부터 3세, 역년 47년 만에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고구려 열제께서 도두를 우태로 삼아 살 집을 주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주어 동부여후(東夫餘侯)로 봉하셨다.

이해 가을 7월에 대소왕의 종제가 백성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선왕(先王)께서 시해를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고, 갈사국은 한쪽에 치우쳐 있어 안락하기는 하나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도다. 나 또한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가망이 없으니 차라리 항복하여 살기를 도모하자”라고 하였다.

드디어 옛 도읍의 백성 1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에서는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살게 하였다. 또 그의 등에 띠 같은 무늬가 있어 낙씨(絡氏) 성을 내려 주었다.

그 후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에서 백랑산 계곡으로 옮겨갔는데 연나라와 가까운 곳이었다. 고구려 21세 문자열제(文咨烈帝) 명치(明治) 갑술(환기 7691, 신시개천 4391, 단기 2827, CE 494)년에 이르러 나라가 고구려에 굴복하여 들어가니 연나부의 낙씨는 마침내 망했다. 

<終>    <환단고기 역사책 원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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