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신시 개국 하

배달국 신시개국 하


신시 배달 개국 하편

치우천황릉의 위치와 천황에 대한 서방 한족의 전설적 추앙

지금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치우천황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성[闕鄕城]에 있으며, 높이는 7장[丈]이라 한다. 진한[秦漢] 시대에 주민들이 항상 10월에 제사를 지냈는데, 반드시 붉은 기운이 진홍색 비단처럼 뻗치므로 이를 치우기라 불렀다.

아마도 그분의 영웅적인 기백은 보통 사람과 아주 달라 수천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헌원은 이 뒤로 쇠미해졌고, 유망도 따라서 영구히 몰락하였다.

치우천황의 웅렬하심은 대대로 온 천하를 진동시켰다. 특히 유주[幽州], 청주[靑州] 지방에서 그 명성과 위엄이 지속되니, 헌원 이래 대대로 스스로 불안하여 그 치세가 끝날 때까지 베개 베고 편안히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사기史記』에 이른바, “산을 헤쳐 길을 내어도 편안히 안주하지 못하고, 탁록의 강가에 도읍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일정한 곳에 살지 못하며, 항상 군사로 보호하여야 했다” 하였으니, 헌원이 얼마나 전전긍긍하였는지 역력히 엿볼 수 있다.

상서[尙書] 여형[呂刑]에 또한 이르기를, “옛 가르침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라고 했으니, 저들이 치우천황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기운을 잃고, 대대로 이 교훈을 전하여 후인을 크게 경계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300년 동안은 전쟁이 없었고, 다만 전욱[顓頊]과 한 번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다.

초대 환웅천황께서 신시를 개척하여 새 시대를 여시고 18세를 전하니, 역년이 1,565년이다. 바야흐로 단군왕검께서 웅씨 비왕[裨王]으로 신시 배달을 대신하여 구환족이 사는 모든 지역을 통일하시고 강역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시니[삼한관경三韓管境] 이를 일러 단군조선이라 한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복희께서 서쪽 변방에 봉함을 받아 직책에 정성을 다하시니, 무기를 쓰지 않고도 그 지역 백성이 감화되어 따랐다.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하여 영토 밖까지 호령하셨다. 후에 갈고[葛古]환웅(10세)께서 신농의 나라와 국경을 정하시니 공상[空桑]의 동쪽이 우리 땅으로 귀속되었다.

또 몇 세를 지나 자오지[慈烏支]환웅(14세)에 이르렀다. 이분은 신령한 용맹이 더없이 뛰어나시고, 머리와 이마를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보호하셨다. 능히 짙은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채광 기계)를 만들어 채광하시고, 철을 녹여 무기를 만드시고 또 비석박격기를 만드셨다.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이분을 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天帝子蚩尤]라 하였다. 대저 치우라는 말은 속언으로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뜻이다.

치우천황께서 신농[神農]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시고 드디어 웅도[雄圖]를 품고, 서방에서 자주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수와 태산 사이를 점령하셨다. 헌원이 등극하자 곧바로 탁록의 광야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후에 오[吳]장군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 땅을 쳐서 전공을 세우게 하셨다.

배달과 단군조선의 통치 정신

『대변경大辯經』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시씨[神市氏](배달 초대 환웅)는 전[佺]의 도로써 계율을 닦아 사람들에게 제천[祭天]을 가르치셨다. 이른바 전[佺]이란 사람의 본래 온전한 바탕을 따라 능히 본성에 통해[通性] 참됨[眞]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씨[靑邱氏](14세 치우천황)는 선[仙]의 도로써 법을 세워 사람들에게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는 법도[管境]를 가르치셨다.
선[仙]이란 사람이 본래 저마다 타고난 바를 따라서 자신의 참된 영원한 생명력을 깨달아[知命] 널리 선[善]을 베푸는 것이다.

조선씨[朝鮮氏](단군왕검)는 종[倧]의 도로써 왕을 세워 사람들에게 책화[責禍]를 가르치셨다. 종[倧]이란 사람이 (우주 안에서) 스스로 으뜸 되는 바에 따라 정기를 잘 보존[保精]하여 (대인이 되어) 아름다움[美]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佺]과 선[仙]과 종[倧]의 도[道] 가운데) 전[佺]은 텅 빈 자리로 천도[天道]에 근본을 두고, 선[仙]은 광명 자리로 지도[地道]에 근본을 두며, 종[倧]은 천지 도덕의 삶을 실현하는 강건한 자리로 인도[人道]에 근본을 둔다.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의미

「대변경』의 「주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인[桓仁]은 천신[天神]이라고도 하니 천[天]은 곧 큼[大]이며, 하나[一]이다.
환웅[桓雄]은 천왕[天王]이라고도 하니 왕[王]은 곧 황[皇]이며 보이며, 제[帝]이다.
단군[檀君]은 천군[天君]이라고도 하니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시다.
왕검[王儉]은 감군[監群]이라고도 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환[桓]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또 크다[大]는 뜻이다. 삼한[三韓]은 풍백.우사.운사를 말하기도 한다. 가[加]는 가[家]라는 뜻이다. 오가[五加]는 곧 곡식을 주관[主穀]하는 우가[牛加], 어명을 주관[主命]하는 마가[馬加], 형벌을 주관[主刑]하는 구가[狗加], 질병을 주관[主病]하는 저가[猪加], 선악을 주관[主善惡]하는 계가[鷄加]를 말한다. 백성은 64겨레요, 무리는 3천이었다.

개천·개인 •개지의 뜻

성인을 보내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일러 개천[開天]이라 하니, 하늘을 열었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이 세상이 하늘의 이법(천리)과 부합되어 하나로 조화[虛粗同體]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 성(인간 속에 있는 삼신의 마음)을 여는 것을 개인[開人]이라 하니,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열어 주기 때문에 세상일이 잘 순환하게 된다. 이로써 형체와 함께 영혼이 성숙해[形魂俱衍] 가는 것이다.
산을 다스려 길을 내는 것을 일러 개지[開地]라 하니, 땅을 개척하기 때문에 능히 때에 알맞은 일을 지어서 세상일이 변화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개척의 삶을 통해 지혜를 함께 닦게[智生雙修] 된다.

한민족 역사 속의 백두산의 의미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이라는 거대한 산악이 광활한 대지 가운데 장중하게 자리잡아 가로로 천리를 뻗고, 높이는 2백 리를 우뚝 솟았다. 웅장한 고산준령이 꿈틀거리며 널리 덮어 배달 천국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신인[神人]이 오르내린 곳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하거늘,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이 단지 낭림산맥이 서쪽으로 뻗은 맥에 매여 있다는 사실 하나로 환웅천황께서 강림하신 일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속에서 묘향산을 태백산이라 한다면, 그 소견은 동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 땅에 국한시키는 것이 된다. 또한 산의 조종은 곤륜산[崑崙山]이라 하여, (우리가) 소중화를 기꺼이 감수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친 것이 수백 년이 지났으되 오히려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이는 글을 폐하고 크게 통탄할 일이로다.

그러나 지금 동방의 여러 산 가운데 태백산으로 불리는 곳이 자못 많다. 세속에서는 대개 영변의 묘향산으로 말하기도 하나, 이것은 실로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들의 눈알이 마치 콩알 같고 팥알 같으니 어찌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 백두산 꼭대기에는 큰 못이 있어 둘레가 80리요, 압록강·송화강·두만강이 모두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 못을 천지[天池]라 부르는데, 바로 환웅 신시씨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묘향산은 조그마한 웅덩이 하나 없고,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도 아니니 거론할 것도 없다.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에서는 태황산[太皇山]이라 부른다. 호랑이, 표범, 곰, 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산에 올라 오줌을 누지 아니하고, 산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가져간 물건을 담아 갔다.

환웅천황이 처음 내려오신 곳이 이 산이다. 또 이곳은 신주[神州](배달)의 왕업이 흥한 신령한 땅이니 소도[蘇塗]에서 제천하는 옛 풍속은 필시 이 산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그리고 예로부터 환족이 삼신상제님을 숭배하고 공경함이 또한 이 산에서 비롯하였으니 평범한 산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금수조차 모두 신령한 감화에 젖어 이 산에서 편안히 살며 일찍이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였다. 사람도 이 산에 올라 감히 오줌을 누어 신을 모독하지 않았으니, 만세에 걸쳐 항상 공경하고 수호하는 표상이 되었다.

삼신산과 동북방의 광명 정신

우리 환족은 모두 신시 배달 환웅께서 거느린 무리 3천 명의 후손이다. 후세에 비록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으나 실로 환단일원[桓檀一源]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신시 환웅께서 처음 강세하신 공덕을 반드시 후세에 전하고 입으로 외고 잊지 말아야 하니
선왕선민[先王先民]이 옛날 삼신께 제사 지내던 이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이라 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신시 환웅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신령한 다스림과 거룩한 교화의 은택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욱 깊어 갔다. 나라를 세워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근본이 다른 나라와 판이하게 달라 우리의 신이한 기풍과 거룩한 풍속이 멀리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 이에 천하만방의 백성 중에 신령한 다스림과 거룩한 교화를 흠모하는 자는 반드시 삼신을 숭배하였고, 동북방을 신명이 머무는 곳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사실이 잊혀지고) 폐단이 생겨나 점점 근거 없고 허황된 길로 빠져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괴이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연[燕].제[齊] 두 나라의 바닷가에 사는 괴짜 방사들에게서 번갈아 나왔다. 그 땅이 구환, 신시와 서로 인접하고,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특히 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풍문으로만 듣고도 기이함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에 다시 미루어 부연하고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삼신산은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하여 당시의 임금을 미혹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동쪽 바닷가에 이르러 바라보니 끝없이 아득하기만 하여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툭하면 “삼신산 역시 발해 가운데에 있다” 운운하나, 사실 삼신산은 각각 세 섬[三島]에 있는 산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봉래[蓬萊]는 쑥대가 우뚝우뚝 자라고 묵은 풀이 길에 황량하게 우거진 곳이라는 뜻으로 곧 천황이 내려오신 장소요, 방장[方丈]은 사방이 일 장[一丈]씩 되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瀛洲]는 바다가 섬에 둘러싸인 모습이니 곧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이다. 이를 총괄하여 삼신산이라 한다. 삼신은 곧 한분상제님[三神卽一上帝]이시다. 그렇건만 더욱 황당하고 괴이한 것은 삼신의 본래 의미조차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 봉선서[封禪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삼신산은 발해 가운데 있는데 일찍이 그곳에 가 본 자가 있고, 뭇 신선과 불사약이 그곳에 있으며, 그곳의 사물과 금수는 모두 희고,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 한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신산에 환혼초[還魂草]와 불로초[不老草]등이 자라므로 일명 진단[眞丹]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백두산에는 예부터 흰 사슴, 흰꿩, 흰매 등이 있었다. 괄지지[括地志]에 “새와 짐승과 초목이 다 희다”라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 산삼이 많이 나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불로초라 여겼다. 산사람이 산삼을 캐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에 제사를 지낸 뒤에 산행을 떠나니, 환혼·불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생각컨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단군세기』에 이르되, “오사구단군(4세) 원년에 임금께서 북쪽을 순수하시다가 영초[靈草]를 얻었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또한 그 증거이다.

10월에 천제를 지내는 풍속은 마침내 천하만세에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풍속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 신주[神州]에만 있는 독특하고도 성대한 의식으로 다른 나라와 가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도다. 옛날의 삼신산은 곧 태백산이고, 지금의 백두산이다.

그 옛날 배달 때의 인문 교화가 근세에 와서 비록 널리 행해지지 못하고 있으나,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후세까지 전해져 온 나라의 남녀가 모두 은연 중에 믿고 받들며,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께서 주관하신다” 하고, 열 살 안 된 어린아이의 신명의 안위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뛰어남과 용렬함을 모두 삼신께 맡겼다. 대저 삼신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일신 하느님이시다.

중국 한족에게 전파된 삼신상제님 신앙

옛적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漢]나라 왕 유철[劉徹](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겸양하시어 (봉선을 하기 위해) 출발하지 않으시니 이는 삼신의 환심을 끊으시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위소[韋昭]의 주[注]에, “삼신은 상제님이시다”라고 하였으니, 삼신설[三神說]이 일찍이 중국에 전파된 것이 분명하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齊]나라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으니, 팔신은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양주[陽主].음주[陰主].월주[月主].일주[日主].사시주[四時主]이다.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므로 반드시 높은 산 아래와 작은 산 위에서 제사 지내는데, 곧 태백산 기슭에서 천제를 지내던 유법[遺法]이다.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반드시 못[澤] 가운데 모난 언덕에서 제사 지내는데, 또한 참성단에서 제천하던 풍속이 전해진 것이다.

천주는 삼신께 제사를 지내고, 병주는 치우천황께 제사를 지내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시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용강[武神勇强]의 비조[鼻祖]이시다.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부리시고 또 만세 도술의 종장이 되어 풍우[風雨]를 부르고, 만신[萬神]을 부르셨다. 이 때문에 상고시대에 항상 천하 군무[軍務]의 주장[天下戎事之主]이 되셨다.

해대[海岱]지방에 엄[奄].남[藍].양[陽].개[介].우[嶼].내[箂].서[徐].회[淮] 팔족이 살았는데, 팔신설[八神說]이 이 팔족에서 생겨 당시에 성행하였다.

유방[劉邦](BCE 247?~BCE 195)은 동이 계통은 아니지만 풍패[豊沛]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풍패에는 치우천황께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유방은 이 풍속에 따라 치우천황께 제사 지내고 북과 깃발에 희생[犧牲]의 피를 발랐다.

드디어 10월에 패상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秦의 수도)을 평정하고 한왕[漢王]이 되어 10월을 한 해의 첫머리로 삼았다. 이것은 비록 진[秦]나라의 역법을 답습한 것이지만, 동황태일[東皇太一]을 숭상하고 경배하며 치우천황께 지극한 공경심으로 제사 지낸 것과 연관이 있다.

4년 후에 진나라 땅을 평정하고 축관[祝官](제사를 담당한 관원)에게 치우 사당을 장안[長安]에 짓게 하였으니, 치우천황을 돈독히 공경함이 이와 같았다.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치우기[蚩尤旗]는 혜성[慧星](살별)과 비슷하나 뒤가 굽어 그 모습이 깃발과 같고, 이 별이 나타나는 지방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라고 하였으니, 치우천황이 천상에서 별의 주재자가 된 것이다.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치씨[蚩氏]는 치우의 후손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창힐[蒼頡]과 고신[高辛]이 다 치우의 후손으로 대극성[大棘城]에서 태어나 산동, 회수 북쪽에 옮겨 살았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풍채와 굳세고 맹렬한 기상이 아주 멀리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방사들이 신비하고 이상하게 꾸며낸 이야기에 현혹된 이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제[齊] 위왕[威王]과 연[燕].소왕[昭王]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을 찾았는데, 진한[秦漢] 때에 송무기[宋無忌],정백교[正伯僑], 극상[克尙], 선문자고[羨門子高]와 최후[最後]같은 무리는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 오리[伍利], 공손경[公孫卿], 신공[申公]같은 무리는 다 제나라 사람이다.

동방 한민족의 신교 문화를 전파한 강태공

옛날 여상[呂尙](강태공) 역시 치우의 후손이다. 그래서 성이 강[姜]인데, 치우가 강수[姜水]에 살면서 낳은 아들이 모두 강씨[姜氏]가 되었다. 강태공이 제나라를 다스릴 때 먼저 도술을 닦고 천제지[天齊池]에서 천제를 올렸다.
또한 제[齊]에 봉토[封土]를 받으니 팔신[八神]의 풍속이 제나라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후에 그 땅에 도술을 좋아하는 자가 많이 나와 신선 황로[黃老](황제와 노자)와 뒤섞이고 부연하여 더욱 풍속을 윤색시켜 놓았으니 이것은 강태공이 그 풍속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강태공이 음부경주[陰符經]를 지어 자부[紫府] 선생의 삼황내문[三皇內文]의 뜻을 조술하였으니 연나라· 제나라 선비가 어찌 괴이하고 허황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또 오행치수법과 황제중경[黃帝中經]이 부루태자(2세 단군)에게서 나와 우[虞] 사공[司空]에게 전해졌는데, 후에 기자[箕子]가 은나라 주왕[紂王](BCE 1154~BCE 1123)에게 진술한 홍범구주[洪範九疇] 또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이다. 대저 그 학문은 본래 배달 신시 시대의 구정법[邱井法]과 균전법[均田法]에서 전해 내려온 법이다.

삼신을 수호하는 벼슬 삼랑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장사를 지낼 때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합장하여 지석(고인돌)으로 표시를 하였다. 이것이 후에 변하여 단[壇]이 되었는데, 지석단[支石壇] 또는 제석단[祭夕壇]이라 불렀다.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城壇]을 만든 것을 천단[天壇]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土壇]을 쌓은 것을 신단[神壇]이라 한다. 지금의 승려들은 이를 혼동하여 제석[帝釋]을 단[壇]이라 칭하는데, 옛날 우리의 고유한 법이 아니다.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郞]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 곧 옛날의 광명[發] 신도[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예언을 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郞]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랑[郞]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절을 지어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것은 승려들이 옛 풍속을 따라 그대로 부른 것이요, 본래 승가[僧家]의 말이 아니다.
또 “승도[僧徒]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 때의 능묘 법제는 천하의 으뜸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는 백성이 계곡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곳에 장사지내지 않았다. 위로 국왕부터 모두 수혈[隧穴]에 옮겨 천신과 짝하여 제사를 지내다가 후에는 더러 평지에 장사 지내고, 박달나무·버드나무·소나무·잣나무를 빙 둘러 심어 표시를 해 두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신시 시대에는 능묘[陵墓] 제도가 없었다.

그 후 중고[中古] 시대에 이르러 국가와 부족이 강성하여 사는 것이 풍족해지자 장사지내는 것도 사치스럽게 되었다.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고, 묘지도 성대하게 단장하여 둥글거나 혹은 모나게 하고 사치스럽게 장식을 덧붙였다. 높고 크고 넓고 좁은 것이 방정하여 일정한 법이 있었고, 내벽과 외분이 모두 잘 정비되고 꾸며졌다. 이후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능묘의 법제가 천하에 으뜸이 되었다.

{신시 배달국 개국 종}終    <환단고기 역사책 원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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