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왕비 허왕후(허황옥)

시조왕비 허왕후(허황옥)


시조 김수로 왕비 허왕후

허황옥(許黃玉, 32년 ~ 189년) 왕비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후로, 허황후 또는 보주태후라고도 한다.  인도 남부 아유타국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다.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낳았다.

 허왕후 
허황후(許皇后)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모이다. 허황옥은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20여명의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태자 거등(居登)을 낳았으며, 188년에 붕하시니 나이 157세였다.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다.

그녀는 10명의 아들 중 2명에게 허씨 성을 쓰게 해달라고 수로왕에게 부탁했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歸依)하여 하동칠불사(河東七佛)에서 수도하여 성불(成佛)하였다. 이후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 성을 사용하던 두 왕자로부터 한국의 허씨 성이 유래되어 김해 허씨로 이어지고 있다.

남편 : 수로왕(首露王)
왕비 : 허황옥(許黃玉)
장남 : 거등왕(居登王)
차남 : 거칠군 허석(居漆君 許錫) – 진례성(進禮城) 성주
3남 : 허명(許明)
4남 : 혜진(慧眞) – 금왕광불(金王光佛)
5남 : 각초(覺初) – 금왕당불(金王幢佛)
6남 : 지감(智鑑) – 금왕상불(金王相佛)
7남 : 등연(等演) – 금왕행불(金王行佛)
8남 : 주순(柱淳) – 금왕향불(金王香佛)
9남 : 정영(淨英) – 금왕성불(金王性佛)
10남 : 계영(戒英) – 금왕공불(金王空佛)
장녀 : 영안공주(永安公主) – 태사 배열문(裴烈文)의 처
차녀 :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국왕이 되어, 국조 여신이 되었다고 전한다.
오빠 : 장유화상(長遊和尙, 다른 이름은 보옥선인(寶玉仙人)

건무(建武) 24년(48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궁중으로 뽑아 들여 왕비로 삼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로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였다.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문득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색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며,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들을 본래 모르는데 내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다고 여겨 관리들을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山神)에게 바쳤다. 그 외에 왕후를 모시고 온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 모량(慕良)이었으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각종 비단과 의복, 피륙과 금은 주옥,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의 궁전으로 들어왔다. 신하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왕후의 신하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대여섯 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였으며,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에 들었다.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 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제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느님을 뵈었는데, 하느님께서 ’가락국의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서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그 말씀이 귓가에 쟁쟁할 뿐이니, 너는 이 자리에서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여러날을 지나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나로서는 커다란 행복이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공주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 때 뱃사공 15명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이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 탔고, 공주의 신하 내외도 역시 말고삐를 나란히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공주의 신하 내외와 노비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였으며,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손님집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편안히 나누어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풍부하게 물건을 주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궁궐 안 창고에 두고 왕후가 네 계절에 쓸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후한의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189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고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 지냈다. 드디어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처음 와서 닻줄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였으며, 붉은 기가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왕후가 데려온 신하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지만, 그들 내외는 모두 1, 2년 후에 죽고 말았다. 그 밖의 노비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고향을 생각하다가 모두 죽어서 거처하던 손님집은 텅 비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항상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이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199년) 기묘 3월 23일에 붕하시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함이 왕후가 죽은 때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워 장사를 지내고 수릉왕 묘(首陵王廟)라고 하였는데, 높이가 1장에 둘레가 300보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형왕(仇衡王)에 이르기까지 이 묘(廟)에 배향하고,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을 기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니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가락국 시조왕후 허씨 유주비(부인당)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성은 허(許)씨니 원래의 계출은 아유타국 남천축국 또는 서역 허국이라 하여 역사문헌에 나타난 것이 동일하지 않으나, 그 국왕의 따님이라 함은 일치한다。 왕께서 분산(盆山)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신지 7년째인 무신(서기四八년)에 왕은 九간(九干)에게 말씀하시기를 『짐(朕)이 이곳에 하강한 것은 하늘의 명령이다。짐의 배필이 되어 왕후를 삼는 일도 또한 하늘이 명령할 것이다.』 하시고 이에 유천간을 시켜 해상에 가 기다리게 하였다。

과연 큰 배가 있어 붉은 기를 휘날리며 석탑을 실었는데 잉신(媵臣) 남녀수 二十인이 공주 한분을 모시고 서남쪽에서 도착하였다。대개 그 부왕이 몽조(夢兆)에 의하여 명령해 보내온 것이었다。이에 왕께서는 장막을 베풀고 禮로 맞아 配德匹美 하므로 五百年 基業을 창조하고 억수의 후손을 계도하셨으니 아! 장하시었다。

지금 융천현(熊川縣)의 부인당(夫人塘)은 왕후께서 배를 매었던 지역이요, 부인당의 동쪽에는 망산도(望山島)가 있으니 유천간을 시켜 기다리었던 곳이요、망산도의 남쪽에는 둥글고 큰 돌이 반쯤 물에 잠겨서 있으니 돌배를 엎어둔 것이라고 이른다。지금 천팔백여년을 상거하여 처음 비석을 세우고 그 옛터를 표시하는데 마침 옛 갑자의 무신(戊申)을 만났으니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오직 공사를 돌보는 자는 김정일(金禎一) 허식(許垣)외 수인이었다。 어느날 허담(許潭)군이 나를 향하여 매우 진지하게 글을 청하므로 굳이 늙은 병을 수습하여 그 전말을 이와같이 대략 서술하는 터 다。

무신(一九○八년) 양월 상한
숭록대부 전공조판서겸 지의금부 경연춘추관사 동지 성균관사
홍문관 학사 원임 규장각제학 기로소 당상 옥산 장석룡 근지.

허왕후 비명
가락 七년에 왕후께서 天命으로 오셨도다。 위(威)는 무신(戊申)이요 월령(月令)은 칠월(七月)에 속하다。옥절은 휘황하고 승참(乘站)과 망산도(望山島) 우뚝하다。 석탑은 바다를 건넜고 붉은 기는 북두(北斗)를 비쳤다.

큰 바다의 서쪽이요 기출변(旗出邊)의 우편(右便)이로다. 왕후께서 배를 매고 왕의 배필이 되셨다. 媵臣들 배례하니 단량(舟梁)이 열(列)을 이루다. 인신(人神)은 유모(有母)이었고 만백성은 환영했도다. 원군(元君)께서 개국(開國)함에 후(后)는 왕(王)을 순응하쎴다. 왕첩(王牒)을 전달하니 붉고 푸른 표전(表牋)이로다. 여기 주포(主浦)는 배가 닿았던 곳이다。북으론 능현(綾峴)을 바라보고 동(東)으로는 고도(古都)를 우러러 본다。

신성한 유적지에 백세(百世)가 어제 같도다。이에 비석을 세우니 백영(百靈)도 소경(蕭敬)하도다。래세(來世)에 명시(明示)하노니 무이(無貳)한 큰 명(命)이로다。
외예(外裔) 보국숭록대부행의정부찬정 학부대신 원임 규장각 학사
여흥 민영소 근찬
후손 종사랑 전행법부주사 김종대 근서

가락국 시조왕비 보주태후 허씨 능비
태후 성은 허(許)씨이셨다. 원래의 계출은 문적이 자세하지 않으므로 고종할 바 없다。후한의 광무제 건무 二十四년이자 수로왕 七년(서기四八)에 책봉하여 왕후 삼으시고 호를 보주태후(普州太后)라 하셨다。덕을 짝하여 같이 아름답고 잘 내조(內助)의 찬화(贊化)가 있으셨다。영제 증평六年(서기一八九) 三월에 훙하시니 보수는 ㅡ백 五十七이요 구지봉 동쪽하니 왕능에서 二리 정도로 상거한다。

열 왕자를 두셨는 바 스스로 동국은 『객지이라 성(姓) 전장할 곳이 없어서 슬픕니다』라고 말씀하셨다。왕께서는 매우 감동하시어 두 왕자로 하여금 왕후 성을 따르게 하셨으니 우리나라의 허(許)성은 이에서 근본 되었다。능묘의 보수와 건립 전말은 왕능 비음기에 있으므로 여기에는 갖추어 찬술하지 않는다。

정해 (인조二十五년 : 一六四七) 二월 일 건립
후손 통정대부 수경상도관찰사 겸 마수군절도사 순찰사 허 적 근지. 
외예 유학 전영 근서.

       < 김해김씨 족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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