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무대왕 김유신 장군1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1


김유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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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金庾信, 595~673818(음력 71))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신라의 삼국통일 달성에 크게 기여한,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이자 충신이다. 후에는 신라의 수호신으로 추앙받았다.

김유신 장군은 삼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수이다. 595(진평왕 17)에 태어나 673(문무왕 13)에 사망했다.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의 후손으로, 진골 귀족 출신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고구려·백제와의 전투와 귀족층의 반란 진압에서 공을 세워 중요 인물로 성장했다. 누이와 결혼한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즉위하면서 정치적 위상이 더 높아졌다. 660년 정월에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었고,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했다. 사후에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봉했다.

김유신 장군 탄생
김유신은 532(법흥왕 19) 9월 신라의 압박에 굴복하여 신라에 귀의한 금관가야(金官加耶)의 왕족 출신으로 가야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12세손이다. 그는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 아들 김무력(金武力)의 아들 김서현(金舒玄)과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 김씨(萬明夫人 金氏) 사이에서 595(진평왕 17)에 출생하였다. 그의 탄생지는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군)이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 태령산(胎靈山)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金庾信祠)를 세워, · 가을로 국가에서 향()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 하였다 한다.

형제로는 김흠순(金欽純)과 보희(寶姬), 태종무열왕의 왕후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이 있다. 배우자는 태종무열왕의 딸 지소부인 김씨(智炤夫人 金氏)이고, 부인과의 사이에서 김삼광(金三光), 김원술(金元述), 김원정(金元貞), 김장이(金長耳), 김원망(金元望) 5명의 아들과 이름이 전하지 않는 4명의 딸을 두었다. 그는 태종무열왕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의 집안이 망명한 가야 왕족이지만 신라 최고위 신분층인 진골(眞骨)이 되었던 것은 그의 부친과 자신이 신라 왕실과 연이어 혼인했던 것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밖에 서자(庶子) 김군승(金軍勝)이 있고, 손자는 김윤중(金允中)과 김윤문(金允文)이 있으며, 김윤중의 서손(庶孫) 김암(金巖)은 당과 일본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또 김유신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후손 김장청(金長淸)도 있다.

장군의 업적
김유신의 탄생은 여러 신이한 일들이 있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어린 시절부터 비범했다. 15세가 되던 609(진평왕 31)에 화랑이 되었고, 이후 산에 들어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면서 능력을 키워나갔다. 그가 젊은 시절 천관(天官)이라는 기녀를 좋아하다가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뉘우치며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는데, 그가 잠든 사이 말이 그녀의 거처로 그를 데리고 가자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는 설화는, 그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첫 사건은 629(진평왕 51), 그가 만 34세가 된 해에 있었다. 당시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시절이었는데, 신라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 지금의 충북 청주시 부근으로 추정)을 공격하였다. 이때 김유신은 중당당주(中幢幢主)로 부친 김서현을 따라 참전하였고, 전투 상황이 불리해지자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을 죽이고, 결국 신라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 낭비성 전투에는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부친 김용춘(金龍春)도 참가했었는데, 이때부터 두 집안이 가까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덕여왕대에 김유신의 누이 문희가 김춘추와 혼인하여 두 집안은 공고히 결합했다. 642(선덕여왕 11) 백제 의자왕의 파상공세에 신라는 대야성(大耶城)을 포함한 낙동강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기는 위기에 처한다.

이때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적군에 피살되기도 하였다. 김춘추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사신으로 갔다가, 당시 고구려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억류되었다. 이에 김유신이 용감한 장사(壯士) 3,000명을 선발해 김춘추를 구출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안 고구려가 김춘추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맺어 나갔다.

김유신은 선덕여왕대부터 왕의 측근 실세가 된 김춘추와 함께 많은 활약을 한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유신은 이 치열한 항쟁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당시 신라에서 김유신의 역할과 위상은 다음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다. 644(선덕여왕 13) 9월에 그는 대장군으로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7성을 격파하고 가혜진(加兮津, 지금의 경북 고령군 인근으로 추정)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신라 왕성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보고하려고 하였는데, 미처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 대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왕이 다시 김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이를 막도록 명령하자, 그는 바로 다시 말을 타고 전장으로 나아가 적군을 격파하였다.

3월에 다시 왕을 뵙고 명령을 완수했음을 보고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다시 백제가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에 왕이 다시 김유신에게 출정할 것을 명한다. 그는 잠시 집 앞에서 장수(漿水, 숭늉 내지 미음)만을 마시고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전장으로 나아갔다.

647(선덕여왕 16) 선덕여왕이 위중하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이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옹립하였다.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권력을 장악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군사동맹을 맺는데 성공했고, 김유신은 여러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갔다.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공격하여 많은 성을 탈취하고 백제의 장졸들을 격살하였다. 648년에 백제의 공격을 옥문곡(玉門谷)에서 저지하며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1,000에 달하는 적군을 목 베었다.

이때 포로로 잡은 백제 장군과 김춘추의 딸 부부 유해를 교환하여 김춘추의 한을 일부 풀어주기도 하였다. 이어 승세를 몰아 공격해 악성(嶽城) 12성을 빼앗으며 2만 여명을 죽이고 9천 명을 생포하였다. 또 더 진격하여 진례성(進禮城) 9성을 공파하고 9천명을 죽이고 600명을 생포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654년 진덕여왕이 돌아가시자 김춘추가 왕위를 이었다.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의 전권을 장악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김춘추는 즉위한 다음 해인 655년 자신의 셋째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내면서, 두 사람은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나아가 660년에는 김유신을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면서 명실상부한 2인자로 세웠다.

그리고 드디어 김춘추의 외교적 성취와 김유신의 군사적 역량이 결합하여 백제 병합에 성공한다. 김유신은 신라군 5만을 이끌고 당군과 함께 백제 정벌을 완수하였다. 신라가 백제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고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의 탁월한 군사적 역량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김유신은 단순히 전투만 잘한 장수는 아니었다.

당이 신라를 도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이후 신라마저 침략할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 수도 사비성 공략시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階伯)5,000명의 결사대를 맞아 고전하면서 약속한 날짜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이에 당의 사령관인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자 김유신은 이에 반발하여 당과의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막았다.

이는 신라군이 독자적인 군사이며 신라와 당은 대등한 협력 관계임을 확인한 것인 동시에 신라군의 결속을 다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을 통해 김유신이 신라군의 정신적 지주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이후 당의 신라 침략 의도를 확인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착실히 할 수 있게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태종무열왕은 백제 멸망 직후 사망하고, 그의 장남 법민(法敏), 곧 문무왕이 즉위하였다. 김유신은 태종무열왕을 이어 자신의 외조카이면서 자신의 처남이 되는 문무왕을 섬기게 된 것이다. 그는 문무왕이 고구려까지 포함한 삼국통일전쟁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역시 크게 공헌하였다.

신라는 당의 침략 의도를 확인한 이후 백제 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을 지원하면서 고구려 공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61(문무왕 1)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 수도 평양을 포위하고 공격하다가, 겨울이 오면서 퇴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때 당군은 식량의 부족과 추위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함부로 퇴각하다가는 고구려군의 반격에 크게 당할 수 있어 곤경을 겪고 있었다.

이때 김유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략을 발휘하여 험지를 뚫고 당군에 무사히 군량을 전하고, 적군의 일부를 유인하여 격파하기도 하였다. 이에 당군이 피해 없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이렇듯 신라는 김유신을 중심으로 당이 효과적으로 고구려를 공략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그러나 이미 김유신은 고령의 나이여서 예전과 같이 일선에 많은 활약을 하기는 점차 힘들어져 갔다. 664(문무왕 4) 그는 70세의 고령을 이유로 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문무왕은 허락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도와줄 것을 청하였다.

김유신은 여전히 신라 군사력의 핵심이고 상징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당시 백제부흥운동의 잔당 토벌에 김유신이 계책을 내기도 하는 등 여전히 그의 역할은 컸다. 이러한 김유신의 존재와 위상은 당에서도 인정하는 바였다. 665(문무왕 5)에 당 고종(高宗)은 사신을 보내 그를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이천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에 봉하였고, 666(문무왕 6)에는 장남 삼광(三光)을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삼아 당에 머물게 하였다. 668(문무왕 8)에는 직접 당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가지는 않았다.

668(문무왕 8) 삼국통일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고구려 원정이 있었다. 이때 김유신은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으로 임명되었으나, 직접 출전하지는 않았다. 다른 장군들이 김유신의 출전을 청하였는데, 이는 여전히 김유신이 신라군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문무왕은 그를 보내지 않는데, 그의 나이와 건강을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의 논공행상에서, 그가 직접 출전하지 않았지만 문무왕은 김유신이 삼국통일에 큰 공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비상위(非常位) 최고 관등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새로이 만들어 승진시키는 한편 식읍 5백호를 주었고, 또한 왕궁에 들어올 때 허리를 굽히거나 뛰어오지 않아도 되는 특전을 내려주었다. 그는 문무왕의 말대로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전쟁에서는 장수로 국내에서는 재상으로 왕을 보좌하여 충성을 다한 인물로, 그가 없었다면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673(문무왕 13) 717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문무왕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 나라를 잘 이끌어 줄 것을 당부하는 충신의 역할을 다하였다. 왕은 신라의 기둥이었던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특별히 비단 1,000필과 조 2,000섬을 하사하여 장례에 쓰게 하였고, 성대한 장례 의식과 함께 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도록 하였다. 그의 무덤은 금산원(金山原)에 조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서산 모지사(西山 毛只寺)의 북동 방향으로 나있는 봉우리에 묻혔다고 한다. 현재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김유신묘(慶州 金庾信墓)이다.

김유신은 신라 화랑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연이어 섬기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한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이자 죽을 때까지 신라의 앞날을 걱정한 충신이었다. 자기 아들 원술이 당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망쳐오자, 비록 그가 패배의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지위가 아니었음에도 군율에 따라 처형할 것을 주장한 것은, 사사로운 정 대신 국가에 대한 충의를 선택한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김유신의 부인 지소부인 역시 김유신이 죽은 이후에도 아들 원술을 만나지 않았고, 원술 자신도 후에 큰 전공을 세워 상을 받았지만, 끝내 자신의 행위가 부모를 실망시킨 것을 부끄러워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고 하니 그 집안 전체가 충의와 명예를 우선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했기에 그는 신라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779(혜공왕 15) 김유신의 무덤에서 혼령이 나타나 미추왕릉으로 가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770(혜공왕 6)에 그의 자손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하여 처형되었는데, 김유신의 혼령이 이를 억울히 여기고 죽은 이후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일을 그만 두겠다고 하며 미추왕 혼령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미추왕이 끝내 허락하지 않아 혼령이 다시 돌아갔지만, 혜공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김유신묘에 가 사죄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김유신이 고구려를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취선사(鷲仙寺)에 하사하여 그 명복을 빌게 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김유신의 후손들이 신라에서 억울한 대우를 받아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당시 김유신이 죽은 후 혼령이 되어서도 신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진 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김유신은 태종무열왕 직계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된 신라 하대에도 여전히 추숭되었다. 흥덕왕(興德王)은 왕족이 아닌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기도 했으니, 신라인들이 그를 어떻게 여기고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김유신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신라 당대에 머물지 않고 뒷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열전 10권에 모두 51인이 실려 있는데, 열전의 첫 3권이 모두 김유신에 대한 것으로, 분량으로 보나 열전에 기재된 순서로 보나 고려시대까지 김유신이 얼마나 중요시 되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열전 말미에 고려 당시까지 말이나 소를 키우는 어린 아이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성리학을 국가통치이념을 삼고 그 실천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했던 조선에서도 김유신은 뛰어난 장군이자 충신으로 추숭되었다. 그가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것이 예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기는 했지만, 김유신 자신의 행적과 업적에 대한 평가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지금 현대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해김씨 족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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